귀로 듣던 나에서, 눈으로 보는 나로


나는 기독교 가정에서 자랐지만

지금은 오랜 시간 무교로 살아가고 있다.

한때는 성령 체험을 갈망하며

성경공부와 새벽기도에 누구보다 열심이었지만

지금의 나는 나라는 존재의 주도권을 먼저 되찾는 삶을 택했다.


이 길은

누군가에게는 교만하게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교회를 떠났기 때문이 아니라,

나로서 더 깊이 세계를 바라보고 싶어서 이 선택을 했다.

신앙을 버린 것이 아니라

영성을 다른 자리에 놓은 것이다.


고대의 한 이야기 속에,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도

자기 존재를 다시 일으켜 세운 사람이 있다.


성경 속 욥이라는 인물이다.

그의 상실과 재탄생의 서사는

종교적 이야기를 넘어서

`인간이 고통 속에서 어떻게 다시 나를 붙잡는가’

에 대한 통찰을 담고 있다.


나는 오랫동안 이 이야기를 이해할 수 없었다.

처자식과 재산을 잃게 하고

뒤에 더 큰 복을 주는 결말이

도무지 공감되지 않았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지?

상실이 보상으로 대체될 수 있나?”


그 시절의 나는

그 상실을 ‘대체 불가능한 절대적인 것’으로 여겼고

고통은 ‘아물 수 없는 상처와 슬픔’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삶을 더 오래 견디고,

더 깊이 건너오고,

더 많이 잃고,

더 많이 다시 세우면서

나는 조금씩 달라졌다.


그리고 어느 날,

오래 묵은 그 구절이

내 마음에 다시 들어왔다.


“이전에는 주에 대해 귀로만 들었는데,

이제는 내 눈으로 봅니다.”


이제는

누군가에게 배운 신앙의 문장이 아니다.

나에게는

어떤 존재가 ‘다시 태어나는 순간’을 이루는 말이다.


욥의 진짜 복은

잃었던 것들을 더해서 돌려받은 것이 아니다.


진짜 복은,

상실 속에서도 자신의 근본을 잃지 않은 것.

절망 속에서도 “나는 누구인가”를 다시 붙잡은 것.

이해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자기 존재를 재구성할 수 있는 힘.


그는 잃어버림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이 무엇 위에 세워져 있었는지 깨달았고,

이전의 얕은 이해를 내려놓고,

더 깊은 자리에서 자신을 ‘다시 봤다’.


그 순간이 바로

그의 거듭남이었다.


상실은

나를 파괴하기 위해 오는 것이 아니라,

나의 존재를 다시 구성하기 위한

아주 깊은 사건일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이 구절을

지금의 나로 읽는다.


“나는 이제 귀로 듣던 시대를 지나

내 존재가 직접 보는 세계로 들어왔다.”


나의 삶도

도망치던 시절이 있었고,

감정의 폭풍을 피해 숨던 시절이 있었고,

남이 말해준 질서에 의존해 살아야 했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요즘 나는

이상하게도

몸은 바쁘고 피곤한데

마음은 밝고 가볍다.


나는 더 이상 도망치는 인간이 아니라

탐험하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전환의 순간은

항상 ‘다시 나를 붙잡는 순간’과 맞닿아 있다.


욥이 그랬던 것처럼

나도 상실보다 더 큰 것을 얻고 있다.


나라는 존재.

나라는 중심.

나를 다시 읽는 눈.


나는 이제

남이 말해준 신앙이 아니라

내가 직접 겪고 깨달은 세계를 본다.


나는 귀로 듣던 세계를 건너

눈으로 보는 나로 살아간다.


이 글은

그 여정의 기록이다.


나는 소망한다.

누구나 자기만의 방식으로 새로워지기를.

자기 내면의 뜨거움을 다시 붙잡기를.

삶을 듣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직접 눈으로 보며 살아가기를.



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