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 휴가를 맞아
아들이 오랜만에
내가 사는 후쿠오카로 왔다.
아들은 외모는 나를 많이 닮았지만
성격도, 취향도,
전혀 다른 사람이다.
그래서 재회의 반가움은 잠깐이고,
곧잘 부딪히곤 했다.
그 바닥에는 늘
젊은 시절
내 손으로 키우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깔려 있었다.
나는 쉽게 예민해졌고,
괜히 더 불안해졌으며,
아들을 지극히 아껴 키워주신 할머니를
응석받이로만 키우셨다며
마음속으로 원망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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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가 어떻든
나는 이혼을 선택했다.
그 선택은
쉽지 않은 길이었다.
긴 별거 끝에
양육권은 아이의 아버지가 맡게 되었고,
나는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그 결정의 중심에는
전 시어머니가 계셨다.
아들은
시어머니가 환갑을 맞던 해에 태어났다.
이미 손주가 둘이나 있었지만
시어머니는 유독 우리 아들을 아끼셨다.
조금은 민망할 정도로,
때로는 지나칠 만큼.
덕분에
나는 육아의 많은 부분을
도움받을 수 있었고,
동시에
끝없는 간섭 속에서
지쳐가기도 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그 관계는
이혼을 결심할 때
내가 기댈 수 있는
현실적인 이유가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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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 이후에도
시어머니와 나는
아들의 공동 양육자처럼
전화와 문자로 이어져 있었다.
그러나
아들의 사춘기 방황 속에서
생각의 간극은 점점 커졌고,
나는 원망을 안은 채
조금씩 거리를 두게 되었다.
살아보면
따뜻한 말이
삶을 지탱해 주기도 하지만,
사람을 성장하게 하는 힘은
오히려
쓴 말에서 나올 때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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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마지막으로
전 시어머니를 만난 날.
어느 날,
내가 일하던 직장으로
갑작스럽게 찾아오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맞은편 도넛 가게에서
내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말과 함께.
“니, 그런 이상한 유니폼 입고
온갖 사람들 비위 맞추며 사니
행복하드나?
니를 나는 어릴 때부터 봤고,
어쩌면 느그 친정엄마보다도
내가 니를 더 안다고 생각한데이.
니는
아무 울타리 없이
이 세상을 견디기에는
너무 약한 아이다.
니는 강하지 못해.
그래, 고생해 보그래이.
나중에 알게 될 기다.
그나마
이 울타리 안에 있을 때가
더 행복했다는 것도.”
나는
아무 말 없이
그 이야기를 듣고
조용히 보내드렸다.
그 말은
그때는 비수 같았고,
시간이 지나며
나를 버티게 했으며,
몇 해 전부터는
사랑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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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전 시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시댁 식구들과는
비교적 좋은 관계였기에
한국에 가야 하나 망설이다가
부의금만 보내고
언니에게 인사를 부탁했다.
그러면서 마음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었다.
‘아들을 대신 키워주신
할머니가 돌아가시면
그땐 꼭 장례식에 가야지.
그때쯤이면
전 남편도
편하게 볼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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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첫날 아침.
아침을 준비하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돌아가신 뒤에
진심으로 감사를 전할 생각이었다면,
살아계실 때
전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지금 아들이 곁에 있다.
이보다 더 좋은
타이밍이 있을까.
그래서 아들에게 말해
새해 인사를
영상 통화로 연결해 보자고 했다.
아들이 먼저 이야기를 나누고,
내가 화면에 들어가는 순간-
연로해진 전 시어머니는
내 얼굴을 보자마자
울음을 터뜨리셨다.
이런 날이 올 줄 몰랐다며.
너무 기쁘다며.
가슴이 먹먹해졌고,
조금은 당황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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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화를 마치고
다시 부엌으로 돌아와
아들과 새해 음식을 준비했다.
아마도
새해 첫날 가장 잘한 일이었다.
옳고 그름을 따지기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