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간 알 수 없는 감성에 휘말려 있습니다. 가끔씩 있는 일입니다. 감정을 통제할 수 있지만 왜 때문인지 알아보고 싶었습니다. 굳이 문제가 되지 않는데 감성을 우울감인 듯 한 추측만으로 무언가의 메시지일 수 있는 것을 차단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다가 뒤죽박죽인 마음을 가누지 못해 직장에서조차 이런 예민한 감정을 들키면서, 폐를 끼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성향은 그런 모습에 더욱 우울함으로 가중되었습니다.
이 세상에 빛이 없다는 것을 안다는 것은 편안하지만 우울합니다. 나 또한 나에게 빛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요. 인간에게는 빛이 없습니다. 인간은 그저 욕망하는 존재입니다. 욕망이 이루어지면 기쁘고 그 외에는 어떤 것도 기쁘지 않습니다. 귀찮고 피곤하고 지루한 일상의 연속일 뿐인 것이죠. 결국 다 사라지게 될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데 매일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인간에게 욕망뿐 입니다.
결국 우리가 기뻐해야 할 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것은 하루하루에 주어진 소소한 것들에 감사를 통한 기쁨만이 우리의 몫일 뿐입니다. 그밖에 어떤 위대한 것도 없는 것입니다. 목적도 목표도 꿈도 없이 살아가는 이 하루하루가 억지 같은 느낌이 들어 우울하였습니다. 그러나 내게 주어진 인간의 의무를 완수해야 하기에 그저 주어진 목숨을 살아가는 것뿐인 것 같습니다. 어떤 날들은 말이죠.
영원히 기뻐할 수 있는 것은 죽음을 넘어서 오게 되는 영원한 구원밖에 없습니다. 그 시간은 아직 몇십 년을 기다려야 합니다. 지금은 무엇으로 행복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최근 내게 주어진 물질의 축복으로 기뻐해야 하는데 그것으로 계속 기뻐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나는 기쁨을 잊어버린 듯합니다. 감사를 잊어버린 듯합니다. 아마 내가 너무 큰 꿈을 꾸었었나 봅니다.
그렇게도 원하던 평탄한 삶을 살고 있는데 행복감을 느끼지 못하고 우울에 빠져 있습니다. 글을 써서 나를 들여다보아야만 합니다. 단지 생각만으로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글을 써야만 나타나는 나의 본질. 매일 글을 쓸 때에는 힘들고 행복했습니다. 그때에는 희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직장생활을 하면서 많은 책을 읽을 수는 없는 나이와 체력이 되었다는 것을 깨닫자 조용히 절망하였습니다.
무엇보다 이 우울을 즐기지 못하고 있습니다. 급기야 우울을 컨트롤을 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았어야 하는데 체력이 힘든 순간에 감정이 나오자 어느새 고착화 되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사람들이 의식되었습니다. 나로 인해 사람들이 우울해지는 것이 싫습니다. 주목되거나 관심을 받는 것이 싫습니다.
회사에서는 감정에 대하여 솔직하지 않기로 다짐을 했습니다. 물론 완전히 포커페이스일 수는 없겠지만 아무도 나를 걱정하거나 예민하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나에게도 예민한 사람이 신경이 쓰이듯 다른 사람들에게도 역시 그럴 것이니까요. 예민한 사람은 고독하기로 예정된 사람입니다.
나에게 작가라는 꿈은 꾸지 않으면 불행하고 꿈을 꾸기에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꿈을 꾸어야만 하는 살아갈수 있는 인생이 맞다고 생각이 듭니다. 꿈마저 사라지면 100년이란 인생은 너무나 허무한 것이 되어버리니까요. 더 이상 내게는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리니까요. 그것은 살아있음이 무가치함이 넘쳐서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아 지기 때문입니다.
결국 다른 길이 없이 나의 한계를 뛰어넘는 신께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기도할 때 이 한계에서 벗어납니다. 나를 초월하는 어떤 순간으로 때로 마법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내가 할 수 없는 것들은 저의 창조주에게 맡깁니다. 그리고 작은 나는 어쩔 수 없이 사소한 것에 감사와 기쁨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계속 우울의 늪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16강에 진출한 기적이 일어난 놀랍도록 다이나믹했던 축구경기에 잠깐의 기쁨을 느꼈습니다.
악한 부류가 패배하는 로망의 드라마에 희열을 느끼며, 알쓸인잡의 인간에 대한 탐구를 보면서 나의 생각을 비교하는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잠깐의 허무함을 잊어 버리고 사는 것이 방법입니다. 겨우 달래고 사는 느낌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일상을 귀하고 소중하게 감사하게 여기는 마음이 내게 지금 없는 것입니다.
생계에 대한 안정과 주거에 대한 안정에 대한 감사함을 느끼며,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더 깊고 심오한 존재의 이유를 찾아 헤맵니다. 사명을 다하는 것은 나에게 유일한 살아있는 이유이며, 고단함은 당연하고 힘들어도 가야 하는 길입니다. 누구라도 그렇겠지요. 회사에서의 일은 크게 심각한 것은 없으나 좋아하는 일은 아닙니다.
작가가 되어 살고 싶은 것 외에 다른 살아갈 욕망이 없는 나를 보고 있습니다.
생각하는 것을 최대한 할 수만 있다면 있는 그대로의 감성을 글로 쓰고 싶습니다. 여기에 도덕과 율법의 잣대를 재지 않고 싶습니다. 감성을 마음껏 풀어내고 싶습니다. 사회에서는 나의 감성을 절제해야 합니다. 글에서조차 감성을 절제하고 싶지가 않습니다. 감성이 살아야 할 공간도 필요하니까요.
그럼에도 인간은 완벽한 행복의 영원함을 알고 있는 존재이기에 끊임없이 그 간극에서 허무함과 허탈함을 느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간극의 차이 때문이죠. 마치 세상을 통달한 성인도 직장에 출근해야 하는 것처럼 말이죠. 우리의 생각은 끝없이 넓은 우주와 같지만 우리의 물질계는 한계가 명확하게 정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곳은 이 물질계일 뿐입니다.
욕망이 이루어진다고 해도 계속 행복하지는 않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욕망하는 존재이기 때문이기 다른 욕망을 꿈꿀 것이라는 것이며, 그래서 깨닫는 것은 인간은 그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아 이것도 하고 또 저것도 하면서 생존과 지식의 향연에 소소한 기쁨들의 누리며 적당한 꿈을 꾸며 살아가는 것으로 행복이 가능할 뿐, 그 이상의 어떤 것으로는 행복을 누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심지어 나조차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이 오면 그저 상황에 대하여 잘 조율하며 가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 그것만이 인간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세상은 내 뜻대로 가지 않습니다.
한계를 느낄때는 지식이 깊고 수준높은 성서나 철학을 읽기도 하고 혹은 묵상을 통하여 다른 차원으로 들어갑니다. 물질계만으로는 물질계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한 차원 더 올라 높은 차원에서 보아야 문제가 보입니다. 인간의 만족은 지적만족인 정신적인 만족을 통한 영적인 만족의 상태에서, 물질계에 한계에 대한 허전함을 느끼지 않습니다. 영적인 통찰은 현상을 넓고 깊게 파고 들어 본질을 꿰뚫어 내기 일쑤입니다.
나 자신이여 ! 다시 희망을 품으세요. 50세가 되어 70세까지 직장생활을 하며 생활자금을 모아 작가 등단을 하고 작가 활동을 하는 겁니다. 베스트셀러 작가는 될 수 없겠지만 몇 권의 책은 내게 주어지겠지요. 베스트셀러와 예술은 다르며 다르게 숨을 쉽니다. 베스트셀러 안에서도 숨을 쉬지만 밖에서도 숨을 쉽니다. 예술은 어디서나 살아 있습니다.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 관점의 문제입니다. 나 자신이여. 우울증에 빠지지 말고 우울을 즐기세요. 감성의 극치에 가장 나다운 모습을 들여다 보는 사유의 시간이죠.
나는 당신이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소소한 행복만이 인간에게 주어져 있다는 한계를 인정하기를 바랍니다. 어차피 큰 행복이 없는 이 세상에서 인생을 즐기며, 게임으로 생각하며 즐기다가 가셨으면 좋겠습니다. 우울을 즐기는 것은 좋지만 우울증은 인생을 망가뜨립니다. 너무 오랫동안 자주 멀리,깊게 보지는 말기를, 한계 이상의 것은 주님께 의지하며 소소한 일상만을 즐거워하기를 주어진 것에 감사하기를, 무엇보다 감성을 온전히 즐기는 삶이 되기를, 나는 내가 행복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