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살아오면서 그래 이것은 운명이었어라고 생각되는 것이 몇 가지 있다. 그것은 벗어날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어떤 것이지만 그것은 결코 나의 의지를 무시하지도 않았고 또한 나의 의지를 무조건 수용하는 것도 아니었다. 운명이라는 것은 내가 하고 싶고 가고 싶은 길을 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거역할 수 없는 삶 속에서의 순응하게 될 수밖에 없는 어떤 상황과 조건과 환경이 맞물려 있는 것을 말하는 삶의 복잡한 성격 중의 일종이다.
민주화 운동을 통하여 아름답던 세상이 비리와 음모로 가득 차있다는 것을 알고 분노한 시간들과 해결될 수 없는 절망의 회의주의 속에서 내내 허무주의자로 살았었다. 지금 돌이켜 보아도 나는 민주화 운동을 외면하지 못하였을 거라고 생각하면 아 운명이었구나라고 깨닫는다. 외면할 수 없는 나의 성향, 기질이 어떤 사건을 만났을 때 그것이 운명이 되는 것이다.
내 삶의 운명은 어떤 것일까를 생각해 보면 가장 중요한 것은 전라도의 광주광역시에서 거주하던 내가 일산에서 거주하게 된 사건이다. 일산보다 서울에 올라가고 싶었다. 왜인지 모르겠다. 지방에 살고 있는 것에 대하여 알 수 없이 마음에 늘 답답함이 있었고 그 답답함의 원인은 알 수 없었고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던 모든 것을 정리하고 집을 팔고 이삿짐센터를 불러 일산으로 올라왔던 사건의 원인은 그냥 답답했다는 것이다.
지금에 돌이켜 회귀해 보면 일산에서 모든 것을 잃어버렸으며 곧 멸망하였으며 또한 곧 부활하였던 것을 돌이켜 보면 이 과정을 거쳐야 할 운명이었던 것이다. 또한 그 운명의 중심에는 신앙이 있었다. 연고도 없는 일산에 와서 유독 감성주의였던 나는 모든 것을 잃어버릴 때쯤 그동안 나에게 수없이 전도를 했던 수많은 교인들의 영향으로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찾았다. 사람은 제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에서야 신을 찾게 되는 것이다.
그로 인해 인문학, 철학, 역사, 신학의 정통한 교회를 만났고 일산에 정착하게 되었다. 만약 이 교회가 아니었으면 광주로 다시 내려갔을 것이 확실하다. 이곳을 기점으로 나의 운명은 바뀌었다.
공산당선언처럼 이상만 남은 사회구조에 대한 절망에 대한 대안은 인간의 한계에서는 할 수 없다는 인정과 인정할 수 없었던 신의 실존으로 인해 하나로 통합되었다. 지구 환경문제로 지구멸망이 멀지 않았음이 가시적으로 대두되는 바와 같이 인간은 사회를 정화시킬 순수를 갖고 있지 못하다. 현재 가장 두뇌가 좋다는 천재 일론머스크 역시 지구를 살리는 방법보다 화성이주를 택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먼저 나는 7년 정도의 고시원생활을 끝내고 서울 근교의 아파트에 당첨이 되어 버렸으며, 내 인생의 고민의 답을 찾기 위해 성서를 30독을 하고, 수많은 사색의 시간들 속에서 아주 어렸을 때의 꿈이 었던 작가의 시작을 하였으며, 또한 서울근교의 아파트에서 살고 있었기에 가능한 인연을 만나 다시 결혼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유독 운명이라는 말에 매력을 느낀다. 이것은 아마 내가 원하는 내가 의도한 것이 아닌 어떤 알 수 없는 마음의 이끌림으로 인해 정해지게 된 돌이킬 수 없는 확정 지어진 어떤 삶의 궤도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궤도가 온전히 스스로 삶의 신념과 기질, 성향에 맞지 않으면 운명이라고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나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한 합의의 궤도인 것이다.
보이지 않는 합의에 의해 확정 지어진 운명은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넌 것과 같다. 어떤 시점에 그 길이 확정 지어진 것이다. 그것은 늘 나에게 수많은 영감과 세상 전체를 바라보는 시야를 틔여주는 성서강해와 그로 인한 청소년들에 대한 사랑의 마음을 사명으로 주신 운명과 또한 어떤 부분에서 나와 너무도 닮은 또 다른 나와 같은 인연을 만나면서 운명에 대한 어렴풋한 생각들을 거의 확정 지었다.
운명이라는 것은 존재하며 그 속에서 불행과 행복은 어떻게 만들어 가는 가에 따라 달려 있다는 것이다. 또한 운명이라고 믿기까지 수많은 고뇌와 전반적인 성찰을 통한 확신으로 나아가기까지의 과정은 반드시 동반되었다. 혹 운명이 아니었다면 그것은 운명이 아니었다고 화답하기 때문에 그리 조심할 이유도 아니다. 물론 돌이킬 수 없는 운명이 정해지기 전에는 수많은 고민을 해야 한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의 운명을 위해서라도 깊이 사색하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운명이라는 것은 운명이라고 믿고 싶은 순간, 이미 수많은 사색의 시간을 거쳐 생각하고 인정하고 순응한다. 인생의 공통분모 속에 운명이 삶의 큰 궤도를 형성하고 가고 있는 것이다. 태어남, 국적, 직업, 결혼, 종교, 죽음 이런 큰 중대사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