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하교를 해도 집에 갈 수 없었다.
언제나 오후 5시까지 학교에 남아 있어야만 했다. 정확히 말하면 보건실이었다.
어떠한 질병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물론 자주 아프긴 하였지만, 내가 보건실에 있어야만 했던 이유는 엄마가 보건 교사였기 때문이었다.
유치원 때부터 초등학교 6학년까지. 그리고 고등학교 2년 동안 엄마와 함께 했다. 엄마가 보건 교사라는 것은 좋은 점이 많았다. 언제나 같이 등교했으며, 어쩌면 내 학창 시절에 나를 진심으로 공감해주던 유일한 친구이기도 했다. 그러나 하교를 해도 곧바로 집에 갈 수 없다는 것은 아주 가끔 힘들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엄마는 항상 보건실이라는 공간 속에서 바삐 움직였다.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서 업무를 봤고, 끊임없이 오는 아픈 아이들을 치료했다. 그중 대게는 치료가 시급했고, 어쩔 땐 마음의 병인 일명 꾀병이 있기도 하였다. 드물었지만 드물지만은 않게 위험하면서 어린 내가 볼 때는 무섭기도 한 몰골의 아이들도 왔다. 그러나 엄마는 언제나 각 아이들에게 맞는 처방을 내리며 또 하나의 생명을 살려냈다.
그러나 이것이 지금은 꽤나 오래 전의 일일 수도 있을 것 같다. 나는 벌써 대학교를 다니고 있고, 엄마는 33년이라는 존경스러운 수로 얼마 전에 명예퇴직을 했다. 이러한 엄마를 축하하기 위해 패와 선물을 보내왔고, 꽃바구니와 케이크도 있었다. 예쁘다고 사진도 찍고 가족과 파티를 하며 엄마의 한 직업을 마무리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났고, 꽃바구니에서 선택된 몇몇의 꽃들이 꽃병에 꽂혔다. 케이크도 이미 반이나 사라진 상태였다.
다시 며칠이 지나자 꽃병에 꽂힌 몇몇의 꽃들 또한 고개를 빳빳이 들지 못했고, 내가 그 시간들을 계속해서 확인하고 있던 중 어느 날. 모든 꽃은 없어졌다. 겉면에 조금의 물기가 뭍은 깨끗한 꽃병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이번에도 역시 케이크는 유통기한 내에 다 먹지 못한 채 저 멀리로 남겨졌다.
축하의 순간은 사진으로 남겨졌고, 축하하는 것들은 마지막까지 축하를 다하며 기억으로 넘겨졌다.
받았던 꽃은 졌다.
그리고 그것들이 지는 찰나에 봄이 왔고, 새로운 꽃들이 다시금 피어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