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꿈 이야기다. 바로 어제 꾼 꿈, 낡은 브라운관에 갇힌 듯 주위는 전부 누런빛이었고 난 아주 작은 어떤 생물로 변해 있었다. 바로 옆에서 딱 나만한 털뭉치 하나가 벽 틈 사이로 기어 들어갔다. 나중에 그것이 내가 질색하는 생쥐라는 것을 알게 되는 건 좀 나중에의 일이다. 그것을 따라 나도 벽 틈 사이로 들어갔다. 내 키만한 빨간 벽돌을 비집고 들어가니 그 끝엔 작은 나무문이 있었다. 환영한다는 말 대신 어서오라고 적혀 있는 가게 간판이 퍽 마음에 들었다.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가니 익숙하고 포근한 향기게 따뜻히 포옹하는 것 같았다. 알고 있던 장소 같아 주위를 둘러봤다. 다름아닌 작은 서점이었다.
손님들은 전부 회색 생쥐였다. 나는 화들짝 놀랐지만 징그러운 시궁쥐보단 검은 깨만한 눈동자를 가진 아기 쥐들이 모여 있어서 버틸만 했다. 오히려 귀엽고 포근했다. 그들의 보송한 솜털이 서점 곳곳에 휘날려 코끝을 간지럽혔다. 크게 재채기를 하고 깜짝 놀라 주위를 둘러보는데 특이한 점을 발견했다. ABC로 나뉘어져 있어야 한 섹션이 사람 이름으로 되어 있었다. 김선주, 나영선, 도은영. 가나다 순으로 깔끔하게 정렬되어 있었다. 혹시 싶어서 내 이름을 찾았다. 이가연, 이가연. 그리고 정말 이가연이 있었다. 이가연이라는 이름이 붙은 칸엔 뭘 팔고 있을까 궁금해 종종걸음으로 다가갔다. 깜짝 놀랐다, 다름이 아니라, 내가 지금까지 썼던 모든 일기장을 모아서 판매하고 있었다.
진작에 버린 일기장이었는데, 난 지나간 내 기억들이 궁금해 직원 생쥐를 붙잡고 물었다. 봐도 되나요? 직원 생쥐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상관은 없는데, 눈을 뜨면 전부 잊어버릴걸요? 나는 고개를 저으며 물었다, 잊고 싶지 않은 내용이 있으면요? 직원 생쥐는 그럼 구매를 하면 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난 돈이 될만한 것이 없었다. 내가 시무룩해 하는 걸 보자 직원 생쥐는 외상 시스템에 대해 설명했다. 생쥐들이 가치로 두는 건 작고 소중한 것이라고, 난 문득 두려워졌지만 직원 생쥐는 대부분 기억도 못할 소소한 것들이라고 날 안심시켰다. 나는 값을 지불하겠다 약속하고 초등학교 4학년 일기를 구매했다. 그래도 일기 내용들을 외워보겠다고 일기장들을 펼쳐 달달 외웠지만 눈을 뜨니 정말로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내 머릿속에 불현듯 스친 '오선아'라는 이름 빼고 말이다.
선아는 초등학생 시절 내 베스트 프렌드였다. 하지만 그 애가 호주로 이민을 가면서 영영 멀어졌다. 선아도 보고싶지만 선아와 함께 학교 뒷산에 묻어놓은 타임캡슐이 궁금했다. 10년후, 각자에게 보내는 편지를 넣어뒀다. 뒷산은 현재 재개발 되면서 캡슐도 진작에 흙더미에 쓸려 사라졌을수도 있다.
문득, 이렇게 실수로 흘려버린 나의 기억이 얼마나 많을까 생각했다. 어젯 밤 꿨던 꿈도. 군데군데 치즈처럼 구멍이 뚫려 사각사각 사라질 것이 뻔했다. 그리고, 왜 생쥐였을까? 골목을 쏘다니며 구멍 틈으로 들어가던 들쥐들이 어디로 모일진 궁금하긴 했다. 시궁쥐가 드글드글한 모임 장소 안에서 그들을 어떤 것을 나누고 공유할까?
나는 모종삽 하나를 챙기고 뒷산이었던 공사 지역을 가보기로 했다. 하여간 파보면 뭐라도 나오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었다. 대충 옷을 갈아입고 파란색 양말을 신으려는데 한 짝이 없다. 가장 아끼던 양말이었는데. 나는 자리에 주저앉아 길게 숨을 쉬었다. 제대로 값을 지불했구나, 누군가 내 기억을 보관해 준다는 걸 알게 됐으니, 그걸로 괜찮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