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을 쓴 뒤

책방 시나몬베어

by 은채

월간 '어린이와 문학'은 2005년에 창간한 문학 계간지입니다. 어린이와 청소년 문학인들의 작품과 글이 실린 알찬 내용의 계간지입니다. 후원금으로 운영되고 있고, 여러 운영위원들 역시 자원봉사로 일합니다.

'어린이와 문학'은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기 위해 2024년 겨울호를 끝으로 휴식의 시간을 갖는다고 합니다. 감사하게도 그 마지막의 길에 그림책 서평을 실을 수 있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서로를 위로하고 응원하는 힘 - 기억나요

『 기억나요? 』 는 한부모 가정에서 자란 작가의 자전적인 이야기로, 엄마와 아들이 어둠 속에서 나란히 누워 행복한 기억을 되새기며 서로를 응원하고 위로하는 내용의 그림책이다.

“기억나니?” 하며 먼저 입을 연 엄마는 다 같이 나들이를 간 날, 아들이 뱀과 벌레를 찾으러 갔다가 산딸기를 들고 온 걸 이야기한다. 쨍한 햇살 아래에서 아이의 두 손에 담긴 산딸기는 빨갛고 탐스럽다. 아이의 눈에 비친 아빠는 무언가 진지한 얘기를 하고 있고, 엄마는 그런 아빠를 향해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다. 아이는 “그 산딸기 정말 달콤했죠!”라고 말하며 처음 자전거를 타던 날을 기억해 내고, 그 기억은 햇빛 먼지와 웃음소리를 담고 있는 것처럼 그려져 있다. 폭풍우 치던 밤에는 산딸기의 달콤함 대신 오래된 석유등 냄새를 기억하게 되고, 아빠와 헤어져 엄마와 차를 타고 멀리 떠나온 날의 기억은 자동차의 룸미러를 통해 서로의 표정을 살피는 눈빛으로 그려져 있다. 아마도 아이가 뒷좌석에서 잠든 걸 확인한 뒤 엄마는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을 거다. 두려움과 불안과 막막함을 삼키며 몰래 한숨짓고 울었을 거다. 그러나 이 책에는 그런 흐느낌이 없다. 현실은 어둠이 내려앉은 방이지만 그들이 기억하는 모든 장면은 여름날의 햇살처럼 환하고 눈부시다.

그들이 기억을 더듬으며 이야기하는 내내 모든 장면은 밝음과 어둠을 반복하고 마지막에는 아침 햇빛이 잠든 두 사람 위에 축복처럼 내려앉아 이야기가 갈무리된다. 방 안으로 서서히 아침 빛이 들어오자 아이는 일어나 창을 열어본다. 버스의 덜컹거림과 빵 굽는 냄새, 도시 위로 떠오르는 마법 같은 해를 보며 오늘도 언젠가 추억으로 남으리라는 생각이 아이에게 차오른다.

어둠이 내렸던 방 안에 환한 아침이 들어오고 아이는 중얼거린다.

“걱정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았어요.

우린 잘 지낼 줄 알았으니까요.”

아이는 멀리 떠나오던 날 도시 구석구석을 안내해 준 곰 인형을 안고 엄마의 품으로 들어간다. 둘은 꼭 끌어안고 아침 햇살 속에 누워 마지막 문장을 남긴다.

“그래요, 꼭 기억할 거예요.”


사람은 대부분 좋은 기억보다는 나쁜 기억을 되새기는 습관을 갖고 있다고 들었다. 특히 이혼이나 이별처럼 내 의지로 안 되는 상황의 변화는 서러움과 분노를 증폭시켜서 좋은 기억을 떠올리기가 어렵다. 그런데 시드니 스미스는 걱정과 두려움이 당연했을 그 시간을 매우 담담하고. 씩씩하게 회고했다. 시각, 청각, 미각, 후각을 이용해서 글을 생생하게 만들고, 과감한 클로즈업과 쪼개진 이미지들의 연속성으로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처럼 연출한 작업 방식이 멋지다.

줌으로 하는 북 토크에서 작가를 처음 봤을 때 차분하고 예의 바른 인상을 받았다. 그는 『 기억나요? 』를 통해 서로를 위로하고 응원하는 힘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아들과 딸을 떠올렸다. 그들을 통해 내가 얻은 위로와 희망, 응원을 새삼 깨닫자 『기억나요?』의 표지에 그려진 소년의 정면 얼굴이 내 아들과 딸의 얼굴처럼 보였다. 그 얼굴은 나를 향해 “엄마, 기억나요?”라고 묻는 것 같았다.

나는 기억하고 싶었다. 그래서 앞날을 향한 걱정과 두려움을 잠시 내려놓고 코를 벌름거려 보았다. 그러자 창문을 넘어오던 4월의 라일락 향기와 2월이면 냄비 속에서 보글거리던 딸기잼의 새콤한 향이 맡아졌다. 깊고 파란 바다 같았던 담양의 밤하늘과 장작불이 일렁이던 제주의 밤이 눈앞에 펼쳐졌고, 두두두두 달렸던 루지의 소음과 그날 우리들의 등 뒤로 퍼졌던 노을도 보였다. 거실을 채우던 아들의 피아노 소리가 들렸고, 딸의 핸드폰에서 흐르던 노래와 바람에 흔들리던 하얀 커튼이 한 장의 사진처럼 떠올랐다. 그리고 그 커튼 뒤에 숨어 분홍 코를 내밀던 고양이가 울며 현실의 나를 부르는 지금, 나는 『 기억나요? 』의 표지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다.

‘그래, 걱정하지도, 두려워하지도 말자. 우린 잘 지내왔고 앞으로도 잘 지낼 거야. ’

김소예 @sooaroha

서양화를 전공한 뒤 한국 일러스트레이션 학교에서 그림책 과정을 공부했다. 쓰고 그린 책으로는 『아빠는 곰돌이야』, 『나는 불에서 태어났어』가 있고, 김포에서 가정식 책방 시나몬베어(@cinnamonbear_books)를 운영하며 아이들에게 독서 수업과 미술 수업을 하고 있다.


시드니 스미스는 캐나다 노바스코샤 주의 시골에서 태어나 노바스코샤 예술 대학을 졸업했습니다.『나는 강물처럼 말해요』,『할머니의 뜰에서』,『바닷가 탄광 마을』,『흰 고양이와 수도사』,『거리에 핀 꽃』등에 그림을 그렸고, 쓰고 그린 책으로는『괜찮을 거야』,『기억나요?』가 있습니다. 그는 보스턴 글로브 혼북상과 케이트 그리너웨이상, 에즈라 잭 키츠상을 수상했으며 2024년에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상을 수상했습니다.

처음으로 긴 글의 서평을 쓰면서 글을 쓴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생각했어요. 더군다나 저 같은 초보자는 글에서 자신이 그대로 드러난다는 사실에 많은 용기가 필요했답니다. 포기하려는 자신을 되돌리기 위해 몇 번이나 입술을 깨물었는지 몰라요.

그래도 글을 쓰면서 내내 슬픈 기억들을 더듬었는데 마지막 문장의 마침표를 찍을 때에는 미소를 짓고 있었죠. 칼바람 속에서 마냥 버티며 살아왔다 생각했는데 온기로 채워졌던 순간들이 불꽃놀이처럼 펑펑 떠올랐거든요. 이것이 글쓰기의 힘일까요?

서평을 쓰고나니 시드니 스미스의 그림책 '기억나요?'는 제게 더욱 특별한 책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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