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를 우렸는데 술을 꺼내 티타임이 아닌 술타임.
엊그제 아버지 일주기가 지났다.
연못 바닥을 헤집은것처럼 뭔지도모를 감정의 부유물이 둥둥 떠다닌 일년이었고,
아버지는 한 달 전부터 건강한 모습의 생전 차림새로 아들 딸 손녀의 꿈을 순회하며 식사를 하셨다.
아버지는 엄청난 애주가셔서 술을 반기셨는데
이상하게, 결혼 전 소개의 그날부터 와병 전 추석까지 단 한 번도 남편에게 술을 권하지 않으셨다.
어느날 친척들 모인 자리에서 어느 육촌 오빠가
“당숙, 술 좋아하시는데 사위랑 자주 한 잔 하십니까. 독하게 시험좀 하셨겠지요. 하하“
하니, 아버지 왈
”나는 사위한테 지금까지 술을 권해본 적도 한 번 없네.
술 먹고 술병이라도 나면 그게 다 우리 딸 고생이야.
자네들 혹시라도 우리 사위에게 술 권하지 말게.“
술 못하는 사위가 마뜩치 않아 권하지도 않으시나 했는데 그게 아니었던거지. 그저 딸에 대한 배려셨던거다.
최연장자인 아버지의 말씀인데다, 내가 그 얼마나 고이는 딸인지 다들 알고 있어서 이후로 술고래 집안 어른이며 친척오빠들이 장난으로도 남편에게 술을 권하는 일은 없게 되었다.
아버지는 독주도 잘 드셨지만 식사때 와인이나 사케류의 순한 술을 곁들이는 것을 좋아하셨는데, 아버지 생각에 좋은 와인이며 사케를 보면 꼭 쟁이곤 했다. 그리고 주말이나 누구 생일이나 별다른 일은 없지만 들를 수 있는 시간이 있어 친정에 가게 되면 쟁여둔 술을 한두병씩 들고 나갔는데, 그런 맛난 반주가 그렇게 소소하게 재밌을 수가 없었다.
베란다며 창고에 기십만원은 거뜬히 넘을 술이 남아있다. 아버지 가신 후로 손도 대지 않다가 언젠가 추석인가 설인가에 구한 “대장부 설국”이 창고 구석으로 빼꼼 보이길래 꺼내들었다. 비싼지는 모르겠지만 쌀로 만든 증류소주라 맛이 꽤 괜찮다. 명절때는 더 구하기가 어렵다고 들었는데 장인 드린다고 사위가 챙겨두었던 술이다.
술 한잔 두잔 세잔.
안주로 아버지 제사에 올렸던 전 한 접시.
아버지 살아 계셨으면 붙잡고 조언을 청하고픈 것들이 있는데.
아버지, 이렇게 영욕이 교차하는 삶을 아버지는 무슨 마음으로 견디셨어요.
말없는 아버지는 촌철살인같은 한마디씩을 던지시는데, 찰진 비유에 깔깔 웃다가도 되새기면 머리가 차게 식곤 했다.
이제 아버지는 가시고 안계시고 기억 속의 아빠 나이가 된 내가, 자식 앞에 최대한 의연한 척 하며 인생을 견디고 있다.
아, 그렇구나.
아버지는 우리를 보고 견디신거구나.
이렇게 간단한 결론이 이토록 사무치는
아버지의 일주기.
2023. 6. 19
파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