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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미 파커 Dec 08. 2021

도쿄의 '강남'이란 곳에 살게 됐습니다

드라마 '도쿄여자도감'의 맞선남을 떠올리며   

*이 글은 브런치북 <인생에 한번은 여자혼자 도쿄>에 실린 후 매거진 <그녀들의 도쿄 리스트>를 위해 재발행됐습니다.  


“넌 사주에 물이 없어. 남자가 없는 팔자지. 가능하면 물 많은 곳엘 가. 운동을 하려면 수영장을 다니고, 여행은 산보다 바다로 가. 그리고 술자리는 빠지지 말고 꼭 참석해.”


이 무슨 충격적이고 기괴한 소린가. 싶었는데. 사주 좀 본다던 선배로부터 이 이야기를 듣고 일 년쯤 지났을 때. 나는 물 많은 나라로 떠나게 됐다. 일부러 찾아 헤맨 건 아닌데,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도쿄행이 정해져 있었고, 선배의 그 말이 떠올랐다.

도쿄의 물. 도쿄 스타벅스 후지산 워터.

오 저 갑니다. 가.

바다로 둘러싸인 '섬' 나라에 간다. 그것도 일 년이나!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막연한 기대감. 이보다 더 물 많은 곳도 없으리라. 점점 어떤, 이상한 확신까지 차 올라왔다. 심지어 내가 살 동네는 이름부터 바다향이 난다. 미나토구(港区). 미나토(港)다. 항구 항 자에, 구역 구(區, 일본식 한자는区) 자를 붙여, 그냥 읽어도, 항구.


미나토구는는 서울로치면, '강남' 같은 곳이라고 한다. 일본 전국에서 월세 1위, 연평균 연봉 수입도 1위인 부촌이다. 물론, 내가 미나토구 평균 월세 수준의 집에 기거한 건 당연하게도 아니다. 다녀야 할 학교가 이 지역에 있었고, 나는 감사하게도 학교에서 운영하는 기숙사(비슷한 곳)에 아주 저렴한 가격에 머무를 수 있었다.


도쿄에서 살게 될 집이 미나토구에 있다고 하자, 주변의 '일본통'들로부터 이런저런 정보를 얻을 수 있었는데, 사실 가장 인상깊은 이야기는 드라마 '도쿄여자도감'를 통해 알게 됐다. 아키타에서 상경한 여주인공이, 도쿄에서의 장밋빛 인생을 꿈꾸며, '언젠가는' 하는 마음으로 올려다본, 롯폰기의 고층 아파트가 있는 곳이 미나토구이고. 그녀가 미나토구에 사는 남자와 맞선을 보는 장면도 아주 흥미로웠다. '미나토구 부심'으로 가득찬 이 맞선남은 이런 대사를 읊는다. "저는 미나토구에서 나고 자라서, 미나토구에서 초중고 대학교를 나왔고, 친구들도 모두 미나토구 출신이죠. 그래서 결혼도 미나토구 출신과 하는 것이...."  님.. 여기 왜 나온거임? 하는 표정의 주인공. 사투리를 잘 숨긴 줄 알았는데, 거리에서 길을 묻자마자 "혹시 아키타 출신?" 이라는 되물음을 받곤 하는 주인공이, 이런 미나토구 오타쿠(?)와 잘 될리가 없다. 나는 이 장면이 한국으로 치면, "저는 서초구(특별히 이 지역에 감정은 없구요, 그저 부촌의 상징이니까..)에서 나고 자라서, 서초구에서 초중고(대학은 없으니까)를 나왔고, 친구들도 모두 서초구 출신이죠. 그래서 결혼도 서초구 출신과 하는 것이..." 하는 격이네군,  하면서 막 웃다가 '이런 사람과 잘 될 필요도 없어!' 하면서 주인공 편에 서서 조금 씩씩대기도 했다.   


구글지도에 담아온 2019~2020 나의 도쿄 좌표.


여하튼 그 동네에 간다. 출발 때를 생각하면 벌써 2년도 더 된 얘긴데.  출국일을 기다리며 내가 가장 심혈을 기울여 한 행동은 뭐냐면.  다름 아닌 책장 정리다. 묵혔던 책을 도쿄에 가져가서(1년이나 지내니까, 가능할 거라 믿었다. 어리석게도) 읽고도 싶었고, 이제 더는 설레지 않는 책은 떠나기 전에 필요한 사람들에게 줘야지 생각했다. 이민도, 이사도 아니고, (겨우) 1년이지만 인생의 새로운 페이지를 연다는 기분에, 나름대로 일종의 의식 같은 걸 치른 셈이다. (떠날 당시엔) 직장생활 12년 차. 드디어 출근과 마감이 없는 ‘미지의 세계’로 간다. 진부한 표현을 가져다 붙이면, 그곳은 꿈과 환상과 모험이 있는 곳! 당시엔 너무 설레 자다가도 웃음이 나올 정도였으니, 이 정도 의식은 이 과한 것도 아니리. 또, 농담 반 진담 반, 나는 사주의 저주(?)에서도 벗어나고 싶었다. 사포자(사랑을 포기한 자임.) 탈출도 해야하니, 감성 충만 연애소설도 몇 권 챙겨야했다.


책장을 살피면서, 한 시절을 함께 통과했던 옛 책들을 ‘발견’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그게 사랑과 관련된 것이면 더 그랬다. 그 시절은 다시 오지 않아도 그 기분, 그 마음은 소환 가능했다. 책의 표지를 쓰다듬는 것 만으로, 그리고 그저 ‘읽는 것’만으로. 가져가도 안 읽는다는 경험자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나는 바리바리 책을 쌌다. 책장에서 만난 내 인생의 소중한 조각들을.


그래서 그 책들이 뭐냐하면. 이렇다.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우리는 사랑일까’ ‘그 남자네 집’ ‘낭만적 사랑과 사회’


영화로도 만들어진 엘리자베스 길버트의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는 사랑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뉴' 고전이다. “너 자신을 용서해”라는 말에 감명받던 ‘나’는 이제 없지만, 새로운 ‘나’는 이 대사를 일본 생활의 주제어로 삼았다. “때로는 균형이 깨져야 삶의 더 큰 균형을 잡을 수 있어.” 출근을 멈춘다는 것, 마감을 하지 않는다는 것. 당시 내 삶에 가장 거대한 균열이었으니까.


냉소가 사랑의 가장 큰 적임을 알려 준 건 알랭 드 보통의 ‘우리는 사랑일까’였다. 일상의 의문들을 도식화하고, 연인들의 머릿속을 열어본 듯한 그림까지 등장시키는 이 지적인 소설은 그 어떤 연애소설보다 낭만적이었다. 책은 사랑에 대한 관념뿐 아니라 ‘글쓰기’에도 다른 눈을 뜨게 해 줬다. 그런다고 알랭 드 보통처럼은 쓸 수도 없고, 여전히 글쓰기는 힘겹지만.


박완서의 ‘그 남자네 집’은 한 장 한 장 옛 연인과 함께 읽은 기억들이 빼곡했다. 책 속 인물이 물(아, 여기도 물이 등장..)처럼 담담히 옛사랑을 흘려보내는 것처럼, 나의 '그 사람'도 어느 날 담담히 잊혔지만.  


정이현의 ‘낭만적 사랑과 사회’에는 그리움이 가득했다. 주인공의 발칙한 연애 방정식에 ‘옳다’ 혹은 ‘그르다’며 만날 때마다 이야기꽃을 피웠던, 어느 면에서는 그 주인공들을 닮아 있던 ‘우리’ 말이다.

낭만적 사랑과 사회.


그런데, 내가 도쿄에 사랑 소설 리스트만 들고 간 건 아니다. 당시 나는 우스갯소리처럼(이지만 기대감은 부인할 수 없다) “사주에 물이 없어서 섬나라에 간다"라고 말하고 다녔다. 수학을 포기한 것도, 사회를 포기한 것도 아니고, 사랑을 포기하다니. 나를 가끔(아주 가끔이다. 사실 남들은 내게 큰 관심 없다) 안타까워하던 친구들은 이 용단(?)을 환영했다. "학교 다니는 거지? 연하남을 꼬셔!" "인생 뭐 있냐? 화려한 나이트 라이프를 즐겨!" 등 모든 게 ‘남자’로 수렴되는 격려와 응원을 보냈다. 그 열기에 부응하고자 나도 미션 리스트를 만들었다. 그 리스트는 뭐냐면. 이렇다.


1. 여행지에 혼자 온 남자와 친해지기

2. 남자 바텐더가 있는 조용한 바의 단골 되기

3. 좋아하는 사람과 가장 좋아하는 것 하기.


아, 소박하다. 물 많은 나라니까, 이 정도는 허락하겠지라며.

과연 나는 그 소박한 꿈을 이뤘는가. 그해 봄, 도쿄 어느 캠퍼스.


물은 응답했는가. 사랑 소설 리스트는 마법을 부렸는가. 언젠가 그 이야기를 하는 날도 오겠지. 그건 그렇고, 나는 일본에 챙겨갔던 그 사랑 소설 제 권을 전부 일본에 버리고, 아아니 두고 왔다. 짐이 늘어난 탓이 컸지만, 무엇보다.. 이제는 또 새로운 리스트를 써야 할 때가 왔으니까. 나는 나의 것을, 당신은 당신의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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