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연애소설 리스트 4(BY 미미파커)
“넌 사주에 물이 없어. 남자가 없는 팔자지. 가능하면 물 많은 곳엘 가. 운동을 하려면 수영장을 다니고, 여행은 산보다 바다로 가. 그리고 술자리는 빠지지 말고 꼭 참석해.”
이 무슨 충격적이고 기괴한 소린가. 싶었는데. 사주 좀 본다던 선배로부터 이 이야기를 듣고 일 년쯤 지났을 때. 나는 물 많은 나라로 떠나게 됐다. 일부러 찾아 헤맨 건 아닌데,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도쿄행이 정해져 있었고, 선배의 그 말이 떠올랐다.
오 저 갑니다. 가.
바다로 둘러싸인 '섬' 나라에 간다. 그것도 일 년이나!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막연한 기대감. 이보다 더 물 많은 곳도 없으리라. 점점 어떤, 이상한 확신까지 차 올라왔다. 심지어 내가 살 동네는 이름부터 바다향이 난다. 미나토구(港区). 미나토(港)다. 항구 항 자에, 구역 구(區, 일본식 한자는区) 자를 붙여, 그냥 읽어도, 항구.
미나토구는는 서울로치면, '강남' 같은 곳이라고 한다. 일본 전국에서 월세 1위, 연평균 연봉 수입도 1위인 부촌이다. (물론, 그 월세 수준으로 내가 둥지를 튼 건 아니다. 다녀야 할 학교가 이 지역에 있었고, 학교에서 제공하는 기숙사 같은 곳에 살게 됐을 뿐. 미나토구 평균 월세보다 훨씬 저렴한 곳이다)
여하튼 간다. 출발 때를 생각하면 벌써 2년도 더 된 얘긴데. 출국일을 기다리며 내가 가장 심혈을 기울여 한 행동은, 다름 아닌 책장 정리였다. 시간이 없어서 묵혔던 책을 도쿄에 가져가서(1년이나 있으니까 가능할 거라 믿었다. 어리석게도) 읽고도 싶었고, 이제 더는 설레지 않는 책은 떠나기 전에 필요한 사람들에게 줘야지 생각했다. 이민도, 이사도 아니고, (겨우 일 수도 있는) 1년이지만 인생의 새로운 페이지를 연다는 기분에, 나름대로 일종의 의식 같은 걸 치른 셈이다. (떠날 당시엔) 직장생활 12년 차. 드디어 출근과 마감이 없는 ‘미지의 세계’로 간다. 그곳은 꿈과 환상과 모험이 있는 곳! 너무 설레 자다가도 웃음이 나올 정도였으니, 이 정도 의식은 이 과한 것도 아니리. 무엇보다 사주의 저주(?)에서도 벗어나고 싶었다. 사포자(사회 포기자 아님. 사랑을 포기한 자임.) 탈출을 위해 내게 필요한 감성 충만 연애소설을 챙겨야겠다! 하고.
책장을 살피면서, 한 시절을 함께 통과했던 옛 책들을 ‘발견’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그게 사랑과 관련된 것이면 더 그랬다. 그 시절은 다시 오지 않아도 그 기분, 그 마음은 소환 가능했다. 책의 표지를 쓰다듬는 것 만으로, 그리고 그저 ‘읽는 것’만으로. 가져가도 안 읽는다는 경험자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바리바리 책을 쌌다. 책장에서 만난 내 인생의 소중한 조각들을. 그 리스트를 공개하자면 이렇다.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우리는 사랑일까’
‘그 남자네 집’
‘낭만적 사랑과 사회’
영화로도 만들어진 엘리자베스 길버트의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는 사랑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뉴' 고전이다. “너 자신을 용서해”라는 말에 감명받던 ‘나’는 이제 없지만, 새로운 ‘나’는 이 대사를 일본 생활의 주제어로 삼았다. “때로는 균형이 깨져야 삶의 더 큰 균형을 잡을 수 있어.” 출근을 멈춘다는 것, 마감을 하지 않는다는 것. 당시 내 삶에 가장 거대한 균열이었으니까.
냉소가 사랑의 가장 큰 적임을 알려 준 건 알랭 드 보통의 ‘우리는 사랑일까’였다. 일상의 의문들을 도식화하고, 연인들의 머릿속을 열어본 듯한 그림까지 등장시키는 이 지적인 소설은 그 어떤 연애소설보다 낭만적이었다. 책은 사랑에 대한 관념뿐 아니라 ‘글쓰기’에도 다른 눈을 뜨게 해 줬다. 그런다고 알랭 드 보통처럼은 쓸 수도 없고, 여전히 글쓰기는 힘겹지만.
박완서의 ‘그 남자네 집’은 한 장 한 장 옛 연인과 함께 읽은 기억들이 빼곡했다. 책 속 인물이 물(아, 여기도 물이 등장..)처럼 담담히 옛사랑을 흘려보내는 것처럼, 나의 '그 사람'도 어느 날 담담히 잊혔지만.
정이현의 ‘낭만적 사랑과 사회’에는 그리움이 가득했다. 주인공의 발칙한 연애 방정식에 ‘옳다’ 혹은 ‘그르다’며 만날 때마다 이야기꽃을 피웠던, 어느 면에서는 그 주인공들을 닮아 있던 ‘우리’ 말이다.
그런데, 내가 도쿄에 사랑 소설 리스트만 들고 간 건 아니다. 당시 나는 우스갯소리처럼(이지만 기대감은 부인할 수 없다) “사주에 물이 없어서 섬나라에 간다"라고 말하고 다녔다. 수학을 포기한 것도, 사회를 포기한 것도 아니고, 사랑을 포기하다니. 나를 가끔(아주 가끔이다. 사실 남들은 내게 큰 관심 없다) 안타까워하던 친구들은 이 용단(?)을 환영했다. "학교 다니는 거지? 연하남을 꼬셔!" "인생 뭐 있냐? 화려한 나이트 라이프를 즐겨!" 등 모든 게 ‘남자’로 수렴되는 격려와 응원을 보냈다. 열화와 같은 반응에 부응하고자 나도 미션 리스트를 만들었다. 그 리스트는 다음과 같다.
1. 여행지에 혼자 온 남자와 친해지기
2. 남자 바텐더가 있는 조용한 바의 단골 되기
3. 좋아하는 사람과 가장 좋아하는 것 하기.
아, 소박하다. 물 많은 나라니까, 이 정도는 허락하겠지라며.
물은 응답했는가. 사랑 소설 리스트는 마법을 부렸는가. 한데, 나는 일본에 챙겨갔던 그 사랑 소설을 전부 일본에 두고 왔다. 짐이 늘어난 탓이지만, 이제 또 새로운 리스트를 써야 할 때니까. 나는 나의 것을, 당신은 당신의 것을.
***보너스***
사주에 물 없는 여자가 도쿄에서 열심히 마신 술 사진 (일부) 투척. 술 이야기는 나중에 본격적으로..
*이 글은 2019년 3월부터 2020년 3월까지 짧은 도쿄 생활을 바탕으로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