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미 Feb 16. 2024

매운탕에 라면 퐁당

명절이 지나고 어느 날

혼자 먹는 끼니는 사실 대충 때우기 바쁘다. 나 하나 먹자고 요란하게 뭔가 하기에는 에너지도 의욕도 없는 게 사실이다. 명절 직후에 반복적으로 직면하는 문제가 있는데, 바로 꽉 찬 냉장고이다. 지나치게 가득 찬 식량으로 인해 냉장고를 볼 때마다 큰 숨을 쉰다. 음식이 상하기 전에 무엇부터 어떻게 먹어야 할까 고민한다. 일단 꼬막과 양념게장을 서둘러 먹어야 하는데 남편은 집에서 밥 먹을 일이 별로 없고, 아이들은 해산물을 즐기지 않는다. 그리하여 전부 나의 몫이다.


이번에는 한 가지 더 급한 메뉴가 생겼다. 회를 떠가면서 받은 매운탕 재료! 새우며 조개며 살이 듬뿍 붙은 생선뼈까지 생각보다 양이 많아서 결국 상하기 전에 서둘러 끓였다. 사실 나는 물에 빠진 생선을 좋아하지 않는데 먹을 사람이 나뿐이니 어쩔 수 없다. 아이들이 커서 나와 함께 이걸 먹어줬으면 좋겠다.


"얘들아, 해산물 언제부터 먹을 거야?"

"고등어랑 갈치랑 굴비는 먹잖아요."

"고등어랑 갈치랑 굴비 말고 다른 해산물은 언제부터 먹을 거야?"

"글쎄요. 저 이번에 킹크랩은 좀 먹었잖아요."

"관자는 또 안 먹었잖아."


구워도 안 먹는 생선도 있는 우리 집 아이들은 대체로 쫄깃한 식감을 즐기지 않는다. 이번 명절에는 식탁에 해산물이 넘쳐났다. 꿈에서 바다생물들이 대거 등장해 원망을 듣지 않을까 상상했을 정도로 다양한 바다 출신 먹거리가 양가 식탁에 올라왔다. 아이들에게 최적화된 식단은 아니었다. 우리 애들에게는 역시 붕어빵이 가장 적합하다는 결론이다.


"아니, 아들 하나요?"

"아뇨, 아들 하나 더 있어요."

"워메, 아들만 둘이여? 우리 아들도 아들 밖에 없는데. 엄마가 어쩌냐. 아들 키우는 거 힘들어."

"그래도 아들치고 무난한 편이에요."

"그렇게 말하지 말어. 내가 우리 며느리한테 늘 고생한다고 그래. 아들이랑 딸이랑 달라!"

"아..."


옆에 둘째가 듣고 있는데 붕어빵 아저씨는 거침이 없다. 아들 키우기는 힘들다고 전국민적 합의가 이뤄진 모양이다. 나는 수많은 어르신들의 위로와 응원을 받으며 살아왔다. 사실 내가 미국에서도 충분히 겪어본 일이라 전인류적 합의가 이뤄졌을 가능성도 있다. 붕어빵을 들고 걷는 중에 둘째에게 살짝 물었다.


"아까 붕어빵 할아버지가 아들만 있는 걸로 뭐라 해서 서운하진 않았어?"

"뭐, 사실이니까요. (붕어빵을 먹으며) 제가 생각해도 아들 키우는 게 더 힘들 것 같아요. 우리 반도 남자애들이 훨씬 선생님 말씀을 안 듣거든요. 여자애들도 가끔 그런 애들이 있지만요."


와우, 둘째는 솔직하고 인정이 빠른 편이다. 아무렇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얘기하는 둘째의 말을 듣다 보니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네가 듣기에 괜찮으면 됐다는 생각을 한다.


나는 TMI의 정석인 둘째와 달리 묵묵한 성향을 가진 첫째에게 자주 대화를 청한다. 속내를 쉬이 꺼내지 않는 아이라 고학년을 앞두고 괜스레 마음이 급했다. 나름 수다쟁이지만 깊은 얘기 끄집어내기 어려운 아이인데 나에게 입을 닫는 날이 오는 건 아닌가 두려워졌다. 둘이 네버마인드 병에 걸리는 시기가 온다면 많이 서운할 것 같아서 말이다.


"와, 이제 다음 달이면 고학년이야! 나중에 우리 애기가 엄마한테 입 꾹 다물면 어쩌지?"

"안 그럴 건데요?"

"그러고 싶어질 수도 있어. 당연히 그럴 수 있거든."

"그런가?"

"좋은 일은 깜빡하고 얘기 안 해도 되는데, 마음에 고민이 들거나 힘든 점이 생기거나 생각이 많아지면 엄마한테 얘기해 줘. 알았지?"

"(끄덕끄덕)"


첫째는 씩씩하게 대답하지도 않았고 엄만 별 고민을 다한다는 듯 나를 보며 끄덕일 뿐이다. 그런데 며칠 후 첫째는 내게 할 얘기가 있다고 했다. 울먹이며 꺼낸 그 말엔 그간의 서러움이 담겨있었다. 자기가 동생만큼 사랑받지 못하는 것 같다고 했다. 기본적으로 동생에게 박한 첫째의 모습이 늘 섭섭했지만, 애교 많고 다정하며 막내다운 특징을 가득 가진 둘째와 함께 묶인 첫째는 나름의 어려움을 겪고 있었나 보다. 내가 뭐든 얘기하라고 했을 땐 그 말에 별 관심 없어 보였지만 마음에는 새겨졌던 모양이니 뭐든 엄마한테 말하라고 귀띔하길 참 잘했다.


첫째와 많이 이야기하고 서운한 마음에는 사과도 건네고 나조차 눈물이 났다. 클수록 사랑의 마음을 전하기가 어렵다. 아이들과 보내는 겨울은 참 길다. 둘 다 초등학생이 되어 보내는 첫 방학이라서인지 유독 길다. 잘하고 있는 걸까? 나는 두 아이 사이에서 지혜롭고 사랑 많은 엄마가 맞나? 속이 시끄러워서인지 매운탕을 맛봐도 개운한 게 아니라 속이 울렁거린다. 괜히 라면까지 넣었나 보다. 요새는 라면도 막 맛있다는 생각이 안 든다. 다음에는 시원하고 개운한 메뉴를 먹어야지. 매운탕에는 수제비만 넣어야겠다. 매운탕에 라면은 추천하고 싶지 않다. 뭐든 맞는 게 다 따로 있다.


난 무엇이든 나에게 맞는 걸 찾아가는 2024를 목표로 했다. 뭔가 신나는 일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내 마음을 내가 위로하고 돌보려고 한다. 스스로에게 관심을 끄고 보낸 10년 이상의 시간과는 약간 다른 자세로 올해를 보내려고 다짐하며 이 글을 남긴다.

매거진의 이전글 초딩엄마 되는 법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