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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 다이어터의 무기고

수학문제와 대장장이

by 미미

"어우, 적당히 좀 해!"

"귀엽잖아!"


남편에게 아무리 그만하라고 해도 좋다고 깔깔거리며 웃어대는 통에 어이가 없다. 나의 아이들에겐 놀리는 것에 특화된 아빠가 있다. 바쁜 와중에도 아이들을 마주하면 뭘 가지고 놀릴까 눈을 반짝인다. 이런 아빠를 누구보다 잘 아는 아이들은 아빠가 웬일로 이른 귀가를 하면 놀림을 피할 궁리부터 한다. 심지어 이제 막 누웠으면서 현관 열리는 소리에 놀라 자는 척을 할 지경이다. 이 사람은 정말 장난치고 놀리려고 아이를 키우나 싶을 때도 있다.


"동동아, 체성분 좀 재봐. 일단 몸무게는 알아야 할 거 아냐."

"싫어요. 그냥 다이어트할게요."

"아니, 알아야 목표체중을 정하든 하지."

"싫어요. 엄마가 알면 아빠도 알게 되는데 아빠가 놀릴 거 아녜요."

"엄마만 알고 있을게."

"안 돼요. 어차피 아빠가 알게 돼요."


아, 이제 동동파파는 장난을 접을 필요가 있다. 얼마 전 당근을 통해 집에 들여온 체성분계에 동동이를 올려보려고 설득하는데 극구 거부한다. 그 문제의 학원에 다니면서 수학문제 붙들고 보내는 시간이 너무 길어진 데다 게임도 즐기는 나이가 된 우리 먹보스에게 칼로리 소비에 필요한 활동량이 채워질 리 없다. 자꾸 살이 오르다 못해 내 눈체중계는 동동이는 이제 경도비만이라 추정하고 있다. 수학문제에 들들 볶이다 못해 근래에는 나까지 나서서 풀어주는 상황이 펼쳐지며 애초에 이 학원을 등록한 의미가 퇴색되는 요즘이다. 학원도 영어 수학이 전부인데 현재 수학만 하고 있는 이 느낌. 그만 다니라는 내 말에 꿈쩍도 하지 않는 탓에 어쨌든 운동이라도 몇 가지 시작하기로 했다.


반대로 수학숙제를 세월아 네월아 하고 있는 복복이는 요즘 내 속에 천불을 내는 중이다. 차분하게 꼼꼼하게 풀고 오답 좀 줄이라고 말해도 여전히 숙제를 휘릭 끝내는 느낌이다. 안 하는 건 또 아니라서 골치가 아프다. 혼이 나면 눈물이 그렁그렁한데 혼나는 게 끝나면 금방 그 입에 꿀떡을 물고 오물거리는 복복이. 우리 집 막내는 해맑기로는 1급 수라 그렇게 내 혈압을 올리기도 웃기기도 한다. 우리 집 아이 둘의 성향을 반반 섞고 싶을 때가 있다. 집착의 동동이와 해맑은 복복이의 중간 즈음이면 딱 좋으련만, 양극단에서 나를 들었다 놨다 하는 아이들을 보면 고민이 끝이 없다. 무심하게 키워야 하는데 결국 다심으로 키우니, 생각과 마음이 서로 이십 리는 떨어져 있는 것 같다.


"냐냐냣!"


어느 날, 복복이의 전혀 위협적이지 않은 기합과 종이칼로 이어지는 시답잖은 공격이 꽤 진지한 탓에 남편은 이미 입술을 씰룩이며 웃음을 참고 있었다. 그런데 아이와 장난치며 들어간 서재방에서 튀어나오는 남편은 숨 가쁘게 웃어댔다. 가리킨 곳에 가보니 서랍 한 칸이 열려있고 그 안에는 수많은 종이 무기가 가득했다.


"저것 봐. 엄청 많아! 하하하핳.."


흐느끼듯 웃으며 무기고에 데려다준 남편은 빵 터진 웃음에 몸을 가누지 못했다. 그 서랍에는 모양이 제각각인 칼과 창이 잔뜩 들어있었다. 도화지가 주재료인 것으로 추정되는 무기들은 모양과 크기를 떠나 성능이 비슷해 보였지만 개수가 참 많았다.


"무기고가 있었어?"

"언제 만든 거야?"


웃는 엄마 아빠를 보며 복복이는 쑥스럽거나 부끄러워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만큼이나 무기를 쌓아놓고 있었다는 게 자랑스러운지 서랍을 내보였다. 복복이는 (종이) 칼싸움을 재개할 의사가 있어 보였지만 웃음이 터진 상대로 인해 이 날의 전쟁은 거기서 끝나고 말았다.


"저 하찮은 무기가 저렇게나 많았어...(흐느끼는 중)"

"그러니까. 내가 대장장이를 낳았나? 그래서 복복이가 애기 때부터 모팔모처럼 웃었나?"

"모팔모라니... 엄마가 더 하네..."

"내가 뭘? 모팔모가 강철검을 만드는데..."


복복이는 그날 아빠에게 하루 종일 대장장이 소리를 들었다. 그러다 나와 둘이 집을 나서자 대뜸 무기고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고백했다.


"그런데 무기 대부분 형아가 만든 거라서요. 형아가 대장장이고 저는 사실 군사예요."

"군사? 군인도 아니고 군사?'

"무기를 제가 쓰긴 하는데 형아가 거의 만들었거든요."

"복복이는 왜 안 만들었어?"

"만들긴 했는데 제가 만든 건 금방 망가져요."


동동이가 진짜 무기 장인이긴 하다. 뭔가 생각해서 형태를 잡고 만드는 걸 제법 잘하니까 말이다. 종이로 만들었는데 너무도 튼튼하고 디자인이 각양각색인 무기들을 보니 감탄이 절로 나온다. 남편도 나도 새삼 놀란다. 아니, 그 와중에 그걸 받아 모아 쟁여놓은 복복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모르겠다. 남편은 결국 아이들에게 3D펜을 사주었고 동동이는 더 멋진 무기를 생산 중이다.


동동이의 손가락은 뭉툭한 편이다. 복복이는 내 손을 닮아 가늘고 긴 편인데 동동이 손은 남편의 손을 닮아 떡볶이떡처럼 뭉툭한 모양이다. 솜씨 좋을 것 같은 그런 손가락 모양을 하고 있어서인지 동동이는 만들기를 잘한다. 단순한 재료를 줘도 의도한 걸 표현할 줄 안다. 어릴 때부터 그런 조형감각이 느껴져서 발전시켜주고 싶었다. 안 그래도 복복이가 미술 어렵다고 학원 보내달래서 미술을 시작한 참이라 동동이에게도 이김에 냅다 미술학원을 권했는데 동동이는 시간이 없다며 다니지 않겠다고 한다. 수학학원 숙제 때문에 시간을 못 내겠다는 게 이유다.


"복복이가 너무 재밌대. 너도 좀 배워두면 좋잖아.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가서 릴랙스 하면 좋을 거야."

"다니면 재미야 있겠지만, 지금은 시간이 없어요."

"지금 시간 없다고 하면 나중엔 정말 없지."

"미술 다니면 친구들이랑 놀 시간이 부족해져요."


마인크래프트며, 로블럭스며, 닌텐도며, 그런 게임이야 어차피 앞으로도 쭉 하게 될 거, 난 아직 어린아이들이 조금 더 대장장이로 있었으면 좋겠다. 꼼지락대는 오동통한 손가락으로, 뛰노느라 제법 굳은살이 생긴 발바닥으로, 맛있는 건 기가 막히게 찾아내는 콧구멍으로, 뭐 또 재밌는 거 없나 찾는 그 맑은 눈으로, 좀 더 땅에 발을 닿고, 냄새나고, 손에 잡히는 촌스러운 것부터 차차 겪어나갔으면 좋겠다.


10시에 학원 픽업 다녀온 오늘 이런 소망을 적으려니 헛웃음이 나온다. 수학 그만 다니라는 말은 이제 안 하기로 다짐했는데 이 와중에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주꾸미 낚시 예약한 곳에 입금하고, 남편이 출장 간 사이 데려갈 만한 전시회는 뭐가 있나 뒤적인다. 내일부터 1년간 학교 운동부 하겠다는 동동이를 일찍 등교시켜야 하니 나도 이제 새벽형 인간이 될 예정이다. 아, 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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