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변을 밟고 큰 똥을 피한 날
아이들 스케줄에 변동이 많은 올 가을이다. 오래 다닌 학원을 옮기느라, 레벨테스트를 보러 다녔다. 예체능 수업은 시간이나 종목을 바꾸느라 엑셀 앞에 앉아 두 아이의 일정을 이리저리 짜 맞췄다. 동동이는 맞는 타임을 찾지 못해 어쩔 수 없이 수영을 끊은 대신 방과 후 운동이라도 다니기로 했고, 복복이는 수영 시간을 바꾸는 데 성공했지만 미술학원을 다녀보고 싶다고 하니 주 3회를 차지하던 피아노는 그만두기로 했다. 이런 식으로 조절하지 않으면 놀 시간이 사라질 게다. 하고 싶다고 해도 모든 걸 시키기엔 바쁜 초등학생들이다. 멍 때릴 시간 없는 초등시절은 너무하지 않을까. 내가 쥐고 포기하지 않는 아이들의 게임시간 조절은 학습만 위해서가 아니라 일종의 멍 때림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우리 애들은 참 신기해. 학원은 원래 가기 싫은 거 아냐?"
남편은 미술학원을 가고 싶다는 복복이 얘기에 희한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복복이는 특기란에 상상이라고 적어 넣을 정도로 이야기 만드는 것에 애정이 있다. 사실 어디서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를 단순한 전쟁씬이나 슬랩스틱이 담긴 코미디인데 신난 표정을 보면 나름 창작의 기쁨이 있나 보다. 한편으론, 친구들에게 나의 이야기 노트를 돌리고 방과 후엔 친구들을 모아다 연기를 시켜보며 이상한 내향인으로 지낸 내 초등 시절이 생각난다. 그걸 그림으로도 표현하고 싶은데 그림에 소질이 없으니 답답할 노릇일 게다. 이해한다. 예체능은 특히 재능의 영역이 강한 거라 배운다고 되진 않을 거라는 현실적 조언은 하지 않기로 했다. 다만, 미술 시간에 스트레스받지 않게 학원을 보내주기로 했다. 그리고 동동이에게도 물었다. 많은 학원들에는 형제할인이라는 게 있다.
"동동아, 너도 미술을 좀 배워보는 게 어때?"
"지금은 미술을 할 시간이 없어요."
"흠, 나중에 더 없지 않을까? 넌 조형물 만드는 쪽에 소질도 있고."
"그런 얘길 많이 듣긴 했는데 지금은 공부해야 해요."
누가 들으면 공부 엄청 하는 줄 알겠다. 약간 헛웃음이 나왔지만, 어쨌든 조형미술 쪽에 소질이 보이는 동동이는 똑똑해 보이고자 하는 욕구가 너무 커진 나머지 학원 브랜드에 신경 쓰는 중이다. 영어는 레벨테스트를 너무 못 보고 와서는 레벨 안 올라도 다닐 테니까 재응시 한 번만 하게 해달라고 졸랐다. 재응시가 가능하긴 하지만 재시험 봐서 결과가 잘 나오는 일은 어차피 거의 없다는 학원 측에 읍소한 끝에 재시험을 잡았다. 뭐, 어차피 학원 입장에서야 재응시도 유료시험이고 집착의 동동이가 저렇게 원하는데 어쩌겠나. 이미 아래 레벨 교재까지 구매한 내게 마냥 희소식은 아니었지만 결과는 레벨업이었는데, 동동이는 그제야 그나마 다녀볼 의지가 생겼는지 웃음이 만연하다.
"형아는 왜 그런 어려운 시험을 또 보고 싶다는 거죠?"
이번엔 복복이가 희한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또래그룹의 압박이 이렇게 무섭다. 분위기를 저리도 타는 아이라니. 내 아이지만 항상 조심스레 지켜보게 된다. 신경 쓸 게 많아 힘들겠다 싶기도 하다. 어쨌든 미술을 보내고 싶은데 안 가겠다니 지금 하는 거 잘하라고 했다. 미술이 싫은 게 아니니 방학 때나 특강 정도 경험해 보기로 하고 마무리지었다.
이번에 아이들 학원을 여럿 바꾸면서 참 많은 전화통화를 했다. 상담하는 분이 따로 계신 곳도 있고, 선생님과 직접 연락할 일도 있었다. 게다가 소규모 학원은 직접 연락을 통해 커리큘럼, 시간표, 원비 등을 알아봐야 하니 업무처리 하듯이 전화를 돌렸다. 많은 통화를 하며 목소리로 만나는 사람들에 대해 복잡한 생각이 들었다. 상담이기에 너무도 친절한 목소리, 그 안에서 나는 이 목소리에 담긴 진짜 이 사람을 얼마나 알 수 있을까? 어떤 학원은 정보가 너무 많고 어떤 학원은 정보가 너무 없어서 통화 내용에 의존하기도 한다. 판단하기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아이를 맡기는 입장에서 선생님이 어떤 분인가는 너무 중요한 일이다. 나처럼 학교든 학원이든 선생님의 교육철학과 권위를 중시하려는 학부모에겐 더 그렇다. 공립학교에서 배정받은 선생님이더라도, 페널티 방식이 맘에 들지 않아도, 뭔가 합리적이지 않은 부분이 느껴져도, 나는 컴플레인을 넣지 않는다. 결석을 빼고는 선생님께 연락할 일도, 연락올 일도 별로 없다. 우리 아이들은 집에 와서 많은 얘기를 하는 편이라 속으로 갸우뚱하는 일도 많지만, 아이에게 선생님에 대한 부정적 메시지를 보내지 않는다. 하지만, 학원을 선택할 때는 최선의 필터를 거치고 싶은 마음이 있다. 어떤 과목을 배워도 좋은 성품의 선생님이기를 바라는 것이다. 학원도 일단 다니기 시작하면 선생님의 말씀을 따르도록 가르칠 것이기 때문이다.
방문한 어느 학원에서는 상담 후 등록 결정을 미뤘더니 표정이 좋지 않은 분이 있었다. 당연히 우리 학원 등록할 거 아니었냐는 듯한 고자세에 기분이 별로였지만, 커리큘럼이 지금의 동동이에게 필요하다고 여겨져 전화로 등록 의사를 밝혔다. 그런데 막상 등록 의사를 밝히고부터는 같은 사람도 꽤 친절한 사람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등록을 했기 때문이라고 하기에는 원래 나쁜 사람이거나 그래 보이지 않았다. 상담만 하고 등록하지 않은 날엔 그저 당황해서 나온 반응이었나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다른 학원의 어떤 선생님은 통화에서 설명도 깔끔하고 아이에 대한 설명에도 적절하게 응대해서 방문을 한번 해볼까 했는데 그 학원에 대한 지인의 언질을 접하고 놀라서 확 접어버리기도 했다.
엘리베이터에 탔다가 아무리 생각해도 모양새가 강아지 오줌으로 추정되는 액체를 살짝 밟았다. 알아채고 나서는 그 액체를 피해 엘리베이터 문 앞에 붙어있었다. 소변을 밟았다는 사실에 잔뜩 찌푸린 기분이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소변을 밟았을지언정 큰 똥을 피했다는 천운을 맞이했다. 오랜만에 연락할 기회가 있어 톡을 나누던 분에게서 예기치 못한 정보를 얻은 것이다. 내가 고민하던 학원들 중에서 애를 보낼 학원을 결정한 건 아니지만 애를 보내면 안 될 학원을 알았다. 어쩔 땐 좋은 걸 얻는 것보다 나쁜 걸 피하는 게 더 중요하다. 아이를 키우는 것에 있어서 더더욱 그렇다는 생각이 든다.
전화로는 사람을 의심할 수 없다. 대부분의 상담 전화를 하다 보면, 내가 무의식적으로 이상적인 선생님의 모습을 그려두고 대화를 한다. 아이를 너무도 이해할 것 같고, 마음씨 고운 선생님일 거라는 긍정적 자세로 대한다. 그런데 세상에는 좋은 사람들이 가득하지만 종종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사람도 있고, 사랑이 많은 선생님들도 많지만 아이를 맡으면 안 될 선생님도 있다. 모두가 좋은 사람일 수 없고, 상담전화 속 대화는 서로에게 예의 바르고 친절하다. 난 편하지 않은 이와 통화하는 걸 못 견뎌하지만, 학원을 끊을 때는 꼭 통화를 청해 말씀드린다. 카톡으로 통보하기엔 나의 아쉬운 마음과 감사한 어투가 전해지지 않는 것을 더 못 견디기 때문이다.
잠깐의 대화로 얼마나 그 사람을 알 수 있을까? 상담전화로 시작해 아이를 맡긴 선생님이 좋은 분인 것은 시간이 지나야 알 수 있다. 나는 동동이의 피아노 선생님을 통해 그 감사함을 경험했다. 동동이가 어떤 피아노 선생님을 무섭다고 피아노마저 싫어했다가 마지막엔 나마저 그 선생님이 무섭고 싫어지는 희귀한 상황이 펼쳐졌다. 그런 동동이가 새로운 선생님을 만나고 피아노 연주를 즐겨하더니 콩쿠르 나가는 용기까지 냈었다. 선생님이 나가자고 하면 얘 또 나가겠다 싶었다. 사랑이 있는 너무 좋은 선생님이라는 걸 학부모인 나까지 느꼈으니 얼마나 소중한 인연이었는지 모른다.
이번에 학원을 알아보다가 깨달았다. 어쩌면 모든 만남의 시작은 운에 불과하다. 대화를 시작하고 알아가는 처음에는 누구나 좋은 사람이 되기 쉽다. 첫 대화란, 내가 요즘 수없이 걸었던 상담 전화와 다를 게 없기 때문이다. 깊이 알아가기 위해 시간을 보내고 그 사람을 겪다 보면 이 만남의 운은 뒤늦게 드러난다. 정말 만나지 말았어야 할 인연인지, 세상 소중한 인연인지.
아이들 스케줄에 변동이 큰 이번 가을 학기는 여러 만남에 내 운을 배팅했다. 어떤 인연들이 될지 모를 일이다. 극내향형인 나는 일단 전화를 그만할 수 있다는 기쁨이 가장 크다. 휴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