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친구의 위엄

내가 가장 갖고 싶었던 그것

by 미미

이번 겨울, 우리 부부는 지금 사는 동네에서 버티기로 결정했다. 친구 따라 강남 갈 놈인 내성적 인싸 5학년 첫째 동동이. 여려서 수시로 눈물을 흘리는 막냉이 재질 3학년 둘째 복복이. 이 둘을 키우는 나에게는 동네 선택이 꽤 어려웠다. 뒤얽힌 경제적 상황과 여건들에 골치가 아파 차라리 외곽으로 빠져버릴까 고민한 겨울이었다. 대학만 학군지(?)인 남편의 근무지역을 살펴보기도 하고, 아는 이들을 동원해 이런저런 동네에 대한 조언도 구했다. 그리고, 이 동네에 살아보자는 쉽고도 어려운 결론에 다다랐다.


1월에 1학기 진도를 빼준 남편은 바빠서 2학기 진도는 못 하겠으니 그냥 학원을 보내자고 제안했다. 내가 이미 1학기 심화를 봐주고 있었는데 화가 차오르던 차였다. 초등학생 눈높이에서 이성적으로 가르치는 게 참 어렵다는 걸 실감하며 과외경험 다수인 남편의 침착한 친자식 지도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나는 2월 끝자락이 되자, 동동이의 수학 공부방 선생님에게 둘째 복복이를 맡겨보기로 했다. 영어숙제 헬퍼이자 올해 추가될 과목들을 생각하면 수학 진도까지 책임지는 건 아니다 싶었다. 나보다 몇 년 앞서 아들 둘을 키우고 있는 동동이의 수학 선생님을 신뢰해마지 않는다. 그렇게 아이들 새 학기 스케줄링을 하면서 첫째 동동이 상담도 이어졌다.


"동동이 요즘 동물 학원은 잘하고 있나요?"

"뭐 그냥저냥 하고 있어요. 복습을 좀 열심히 했음 하는데 잔소리를 해도 쉽지 않네요."

"동동이 보면 저희 첫째가 떠올라요. 친구도 많고 장난도 잘 치고. 동동이가 워낙 수감도 좋고 계산 빠르고 정말 잘하는 애거든요. 그런데 막 꼼꼼하고 그렇지는 않아서. 그냥 알아서 하라고 두시면..."

"그냥 안 하는 편이죠."

"네, 근데 얘가 또 잘하려는 욕심은 있거든요. 일단 어머니께서 잡고 끌어주시는 걸 권해드리고 싶어요. 곧 사춘기라 그때는 또 그게 안 될 거라."


내가 생각하는 모습을 선생님도 잘 알고 계셨다. 꼼꼼하게 풀기보다 암산으로 풀고 싶어 하고, 식 세우기 귀찮아하고, 예복습 말고도 공사다망한 우리 동동이는 분위기를 꽤나 타는 아이다. 동물 수학학원에 다니겠다는 걸 허락한 이유도 쉬이 들썩이는 대충대충 마인드를 조금 잡아주고자 함이었다.


"OO이도 친하니까 공부 좀만 더 해서 셋이 같이 동물학원 다니면 좋겠는데... 그럴 생각이 없나 봐요..."


베프 둘 중 하나는 같은 학원에서 더 높은 레벨에 있는데, 다른 하나는 동물학원에 가고 싶을 정도로 하는 스타일은 아닌 모양이다. 동동이는 무척 아쉬운 얼굴이지만, 친한 친구 하나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동동이는 신나 한다. 말 한마디도 금지된 자습실에서 같은 공간에 있는 걸로도 좋아하는 소박함에 당황스럽기도 하고 귀엽고 짠하기도 하다.


남편은 대낮에도 삥 뜯기는 게 일상이고 일상과 범죄의 바운더리가 약할 정도로 험한 지역에서 쭉 자랐다. 그렇지만 공부와 끈기에 소질을 타고났고 거기서 흔치 않은 착실한 친구들 몇과 어울린 결과 그 거친 동네와 이질적인 놀라운 입시 결과를 냈다. 반대로 나는 초등학교 입학부터 대학까지 열두 군데의 집을 거치며 자랐다. 정말 다양한 동네를 경험했지만, 성향이 순하고 인내심이 많은 탓에 크게 걱정시키지 않고 앞가림하며 자랄 수 있었다.


어릴 적 가장 길게 머문 동네는 3년 넘게 산 곳인데 지금까지도 그 기억이 가장 행복하다. 친구랑 만나 서로 단어퀴즈를 내며 등교하고 하교하고 틈이 날 때는 공원에서 연극을 펼치기도 하고 그네를 타며 커서 같이 살 집의 도안을 그리기도 했다. 남편들의 동의가 없는 우리만의 타운하우스였다. 그 시절을 떠올리면 동네 친구가 주는 행복감과 안정감이 충만해진다. 매일 보지만 매일 교환일기를 주고받던, 하는 짓이 쓸데없어 더 좋은 그 시절. 그걸 떠올리면서 나는 지금 동네에 머무는 선택을 했다.


"내가 자기 동네 친구들과 쭉 자란 걸 늘 부러워하잖아. 난 그런 친구들이 없거든. 늘 다시 사귀고 헤어지고 다시 사귀고. 전학 갈 때마다 친구들한테 잘 보여서 눈치껏 적응하느라 긴장하던 기억이 나거든. 그래서 아이들을 전학시키는 게 그렇게 싫다. 물론 상황이 어쩔 수 없으면 해야겠지만 우리가 결혼을 일찍 해서 그렇기도 하고 특히 동동이는 우리 따라 이동이 잦았어서 미안하고 속상하긴 해. 게다가 동동이 성향이 나랑 비슷하기도 하고."


동네 친구들과 쭉 자란 남편이 오히려 나보다 이사에 대해 열려있다. 현재 그가 우리 집의 경제적 주체이기도 하고 나보다 진취적 성향을 가진 사람이라 충분히 이해한다. 그런 남편도 동네에서 하루를 다 보내야 하는 셋이 가장 중요하다며 내게 동의해 주었다. 결국 당장 우리는 내 마음에 가까운 결정을 내렸지만 미래는 모르는 것이니 여전한 불안감 또한 내 마음속을 휘젓고 다닌다.


동동이는 친구들도 화를 안 내고 안 싸우는 친구들과 붙어 다닌다. 분명 내향형인데 어울리는 친구들은 세상 인싸에 겪어보면 다들 순둥하고 공부도 열심히 한달까. 눈물 많은 둘째는 어릴 때부터 남자아이들은 거칠다며 여자아이들과 더 잘 어울린 탓에 녀석을 몇 달 겪어본 어린이집 선생님은 복복이를 꼭 사립유치원 보내라고 말씀하셨다. 처음에는 무슨 말인가 했지만 키우면서 그 의미를 절절하게 느낀 참이다. 지금은 컸다고 남자아이들과 주로 놀지만 여전히 거친 건 싫어하고 마음이 상하면 눈물이 나는데 그걸 잘 받아주고 달래주는 순한 친구들이 있어 다행이다. 입학부터 지금까지 한 곳에서 한 학교를 다닌다는 게 어찌나 안심되는지 모른다. 내가 낳은 얘들이 어디 가도 다른 애들 이겨먹는 성향이 아니다 보니 지금 사는 동네에서 벗어나기 싫다. 내가 겪지 못한 한 동네에 산다는 안정감을 꼭 주고 싶은 욕심이 앞선다.


열심히 할 게 아니면 긴 시간을 동물학원에 쓰는 건 불필요하다는 내 말에 자극을 받았는지 최근 시험은 고점을 받아왔다. 알게 모르게 열심히 했던 모양이다. 같은 학원 다니는 베프랑은 말이 통한다며 점수를 알리고 축하를 나누는 걸 보면 동동이의 동력은 역시 친구다. 동네 친구의 위엄을 실감하며 동동이에게 주말 저녁 메뉴를 고를 자격을 선사했다. 옆에 있던 복복이는 새 학기부터 체르니에 들어간 걸 자랑한다. 바이엘 마무리로 헝가리무곡 치는 동영상을 찍는데 안 틀려서 한방에 패스했단다. 그래, 점심은 네가 고르렴. 기분 좋게 누운 아이들은 이 글을 쓰러 컴퓨터 앞에 앉는 내게 말했다.


동동: 엄마, 오늘 너무 좋은 날이었으니까 저희 육아일기를 써주세요.

미미: 엥? 아니, 일기는 너희가 써.

동동: 아, 그럼 내일 일어나서 오늘 일기를 쓰자!

복복: 그래! 엄마 우리 내일 셋 다 일기 써요!

미미: 아니, 엄마는 왜?

동동: 좋은 날이었잖아요. 오늘 상품권으로 레고도 샀고, 동물학원 점수는 1등이고, 외할머니가 사주신 장난감총도 받았고! 와, 진짜 최고의 하루다! 정말 신나!

복복: 형아야, 나도 내일 아침에 일어나서 레고 조립할 생각 하니까 벌써 신나! 나도 이제 바이엘 다 끝나서 기분 좋아! 잘 치면 피아노도 재밌더라고.


아이들은 즐거운 목소리로 하루를 복기한다. 우리 부부는 아직 안정적이라 할 수 없지만 아이들의 마음이 안정적인 게 느껴져서 기분이 묘하다. 자기들이 너무 즐거운 하루였으니 엄마도 일기를 쓰고 싶을 정도로 신나는 날이었을 거라는 해맑은 마음에 피식 웃음이 났다. 내가 어릴 적, 이사 다니던 나의 부모님 마음은 어땠을까? 여러 가지 생각에 미소가 떠올랐다가 눈가가 촉촉해졌다가 기분이 롤러코스터를 탄다.


얘들아, 새 학기를 축하해. 너희 마음이 행복하면 엄마도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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