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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관계에 필요한 싸움

지쳤나요? 아니요.

by 미미

"지쳤나요?"

"아니요."

"거짓!!"

"헉!!"


언젠가 그런 꿈을 꿨다. 입이 꽉 막힌 것 같은 상황에 처해 말을 잃은 나를 대면한 꿈. 그 무렵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기도 했고 보기엔 멀쩡해 보이겠지 싶은 괴리에 더 힘들기도 했던 때의 꿈이다. 좀 더 정확히 표현한다면 저 유명한 짤과는 살짝 다르다.


"지쳤나요?"

"네.. 니요."

"????"

"네?? 저요??"


화가 나더라도 내 안에서 녹여내려고 하는 성향 탓에 그 용해의 시간 동안 상당한 정신적 에너지를 소비한다. 아무래도 뒤끝이 길어질 수밖에 없기도 해서 유사 상황 발생 시 깊은 DB에 저장되어 있던 기억이 소환된다. 내색을 하지 않으려고 하다 보니 결국 같은 상황이 반복적으로 발생하고 내게 상처 입히는 상대의 특정 행동 또한 개선되지 않는다는 단점이 있다. 그 단점의 결과는 관계 단절이다. 나이가 들수록 애쓰는 관계는 원하지 않게 된다.


내가 이런 사람이라 곁에 두고 싶은 상대 또한 좀처럼 싸우려들지 않는 사람을 선호하기도 한다. 거친 욕설을 사용하지 않는 사람을 좋아한다. 욕설이 아닌 몇 마디로는 해결할 수 없는 각이라면 그냥 붙지 않는 편을 택한다. 회피성향인 거냐고 묻는다면 부정하곤 했는데 다시 생각해 보면 회피적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런데 때로 싸울 수 있는 사람을 보면 통쾌하다. 아이러니다. 살다 보니 고운 말로 풀 수 없는 수수께끼도 등장함을 깨닫는다. 나, 이대로 살아도 괜찮을까?


얼마 전 종영한 언젠가는 슬기로울 전공의 생활에서 남자 주인공 구도원이 억울한 상황을 겪고 나서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는 걸 보고 허공에 대신 욕설을 뱉는 여주인공 오이영이 나온다. 그걸 들은 구도원은 오이영에게 다시 말해달라고 부탁하고 욕 다시 듣기를 하며 깔깔 웃는다. 그리고 이제 자신도 이 여자를 좋아하는 게 맞다고 스스로 인정하는 듯한 체념의 표정이 나온다. 이 장면을 본 많은 사람들은 자기 좋아한다는 여자한테 무슨 욕을 다시 해달라고 하냐고 어이없다고 했다. 욕하는 걸 보고 반한 거냐며 변태적 취향 아니냐고도 했다.


"씨ㅂ, 이런 ㄱ같은 ㅅㄲ를 봤나. 이거 완전 미친 또라이ㅅㄲ네."


문자로 써보니 정말 싫어하는 욕설이긴 하다. 하지만, 난 이 장면에서 마음 깊이 공감했다. 저렇게 욕을 해주는데 예쁘고 귀엽기까지 하니 안 반하냐 그 말이다. 저런 상황에서 나를 위해 욕을 뱉어주는 사람이라면 반할 수도 있는 게 아닌가. 물론 내겐 그 언어의 상스러운 정도에 내적 한계가 있지만. 말이다 어쨌든 이 장면이 명장면 중 하나로 꼽힌 걸 보면, 나와 같은 마음으로 그 상황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적지 않으리라 믿는다.


이런 내 성향에서 발견한 문제점은 내가 원하는 바를 매 순간 명확하게 알기 어렵다는 점이다. 내면을 탐구하지 않고서는 나 스스로가 자각하지 못하기도 한다. 그래서 나의 필요나 지향점은 일기 따위의 글을 통해 문자화하거나 친구와 맥락 없는 수다를 떨 때 불현듯 드러난다.


"아니 그래서, 나는 그게 별로더라고. 어?!! 어??!!"

"왜?"

"나 내가 그게 싫은지 지금 알았어."

"뭔 소리야?"


나의 속내는 가족에게도 드러내기 어렵다. 나는 좋아도 말 안 하고 싫어도 말 안 하는 스타일이다. 알고 보니 나 스스로에게도 떠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대신 내가 좋은 내색을 한다거나 보고 싶어 한다거나 뭐든 해주고 싶어 한다면 그건 정말 좋아하는 거다. 결국 나는 소수의 사람들과 알콩달콩하는 걸 선호한다. 똑같지야 않지만 어딘가 접점이 존재하는 결이 맞는 이들이 소중하다.


다르지만 접점이 존재한다는 건 신비로운 사건이다. 지난 20년 동안 한결같이 INFJ로 살아온 나는 십수 년 전부터 ENTP와 살고 있다. 대부분의 영역에서 멀찍이 서있는 우리는 서로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 정말 커서 -마일드한 표현을 빌리자면- 어리둥절한 순간이 수도 없이 많았다. 그리고 이제야 서로를 좀 아는 것 같다. 때로는 쌓아온 세월과 서로에 대한 경험치가 접점이 되기도 한다. 나 같은 사람이 노력해서라도 없는 접점을 만들고 유지하고 싶어 하는 관계에는 상당한 분량의 호감이 깔려있다. 싸워서라도 유지하는 관계라면 더욱 그렇다.


싸움이 얼마나 기 빨리고 힘든데 그렇게까지 해서 붙여둬야 하는 관계라니. 차근차근 여러 얼굴을 떠올리면서 생각해 보았다. 나는 싸울 각오가 있는가 궁금해졌다.


"지쳤나요?"

"네."

"그럼에도 이 사람과 싸워서라도 지금의 관계를 유지하고 싶은가?"

"네."

"그럼, 그러게나."

이제 상당히 소소해진 내 인간관계망은 싸움을 해서라도 유지해 볼 생각이다. 지금까지 끌어왔으면, 지금도 보고 싶은 얼굴들이라면, 내가 참 좋아하고 있다는 뜻이니 말이다.





이미지 출처: 유튜브 <오분순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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