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잠, 그게 사랑이라면
"유심 교체했어."
"어떻게요?"
"아니, 친구가 전날 실패하고 다음 날 다섯 시 반에 가서 줄을 섰어."
"다섯 시 반이요?"
"어, 그 시간에 갔더니 두 번째 더래. 새치기했다 소리 들을까 봐 적당히 빨리 택시 타고 갔다야."
"아이고야..."
시어머니께서 유심 교체에 성공하셨다는 말에 화들짝 놀랐다. 새벽 다섯 시 반부터 오픈런 재도전을 한 친구분의 부름을 받고 무릎도 허리도 아픈 어머님이 거기서 줄 서서 유심을 교체하셨다니! 일련의 사태에 열도 받고 무리하신 게 속상하기도 했다. 말만 들어도 피곤한 이야기인데 눈이라도 붙이셔야겠네 싶었다. 삶에는 잠을 줄여가며 해야 할 일들이 왜 이렇게 많을까? 월요일 아침, 동네 대리점에서 유심 교체 문제로 싸움이 붙은 어르신과 대리점 직원이 떠오르면서 한숨이 났다.
요 며칠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별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었는데 잠을 잘 못 잤다. 남편이 출장으로 부재해서라기엔 원래 늘 취침이 늦는 사람이라 이유 삼을 수 없다. 나 또한 원래 일찍 자는 사람이었던 적은 없다. 게다가 잠을 못 이루는 편이라기엔 제법 빠르게 잠들곤 하는 요즘이다. 잡다한 일에 몰두하다 3시가 넘어서야 잠들기도 하고 소파에 잠들었다가 뒤늦게 할 일을 하고 갑자기 안방 불을 켜둔 채 잠들어버리는 식이다. 심지어 잠든 아이들의 눈에 드림렌즈를 껴주면서도 중간중간 잠들었으니 내 손가락 위에 200만 원가량이 놓여 아슬아슬한 위기에 처해 있었던 셈이다. 나에게 잠이란 내 머리에 들어있는 투두리스트가 일단락 나야 차례가 오는 일이고, 내 투두리스트는 내 체력과 무관하게 작성되곤 한다.
남편의 해외출장이 있으면 난 괜스레 내 컨디션에 불안감을 갖는다. 마침 지난 주말에 약간 어지러움에 멈춰 선 적이 있었다. 혹시 이석증이라도 재발하면 어쩌나 싶어 아침에 눈뜨면 스스로의 컨디션을 느껴보고자 움직임을 멈추고 집중했다. 평소 친정부모님께 애들을 부탁하는 일은 없지만 그래도 사람일은 모르는 건데 마침 남편의 출장과 딱 겹친 일정으로 해외여행을 가신지라 응급상황에선 연락드릴 곳이 시어머님뿐이다. 문득 생각해 보니 미국에선 가족 하나 없이 어떻게 살았나 모르겠다. 꼭 도움이 아니더라도 그냥 혹시나 하는 상황에 도움을 청할 마지막 보루가 아닌가. 잠을 못 자면 어지러운 건 아닐까 불안감이 심해진다.
5월을 맞아 학교가 며칠 재량휴교를 하기 때문에 나도 덩달아 약간의 여유가 생겼다. 아이들 일정과 숙제가 내 것도 아닌데 일부 챙겨야 하는 부분이 있으니 평소 등교일의 루틴엔 내게도 긴장감이 있다. 이렇게 내 손이 가는 게 앞으로 몇 년이나 되겠나 싶은데 아직 요즘 애들치 고도 영 해맑은 우리 집 애들을 보면 이게 끝나긴 하나 싶을 때도 있다. 안아달라는 애교와 달리 묵직하기 그지없는 무게의 아들들은 이제 귀여움을 대신할 단어가 필요하다. 그렇다고 아직 든든함은 아닌데, 어중간한 이만큼의 성장을 표현할 단어는 무엇일까? 잘 자는 게 도와주는 거라고 단언하며 아이들을 방에 들여보냈다.
나의 최애 가수는 팬들에게 잘 때 잘 자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데 내가 이렇게 며칠 잠을 이상하게 자고 나니 잘 자라는 말이야말로 진짜 축복의 말이 아닌가 싶다. 잘 때가 몇 시든 각자 자야 할 타이밍에 잘 잔다는 게 어찌나 중요한지 모른다. 피곤이 덕지덕지 내 몸에 붙어 다니는 느낌에 어디 굴에 들어가 아무도 날 안 건드리는 며칠을 보내고 싶다. 자식 키우는 일에는 본래 공이 없다지만 휴가는 있어도 되지 않나. 휴가도 없다는 건 왜 미리 안 알려줬을까? 낳자마자 깨달았으니 꽤 늦은 감이 있다. 애 못 봐주니 맡길 생각은 말라던 엄마의 말씀을 들을 때도 미처 이 정도로 끊김 없는 마라톤일 줄 몰랐는데 말이다.
결혼 10주년 정도 되면 둘이서만 여행을 꼭 가라 하시던 주례목사님의 말씀이 떠오르면서 갑자기 약간의 서러움이 밀려오려는데, 그보다 강력한 극한의 곤함이 밀려온다. 빨리 정리하고 오늘은 잠을 제대로 좀 자라는 옐로카드 같은 거겠지? 개운하게 씻고 따뜻한 바람에 머리를 말리고 이불을 빈틈없이 딱 덮고 불을 끄고 휴대폰을 멀찍이 두고 잠드는 걸 상상하며 오늘의 숙면을 계획한다.
"엄마, 무서운 꿈 꿀 것 같아요."
"그렇지만 아직 무서운 꿈을 진짜 꾼 건 아니잖아? 무서운 꿈 안 꿀 거야. 너희는 막상 잠들면 기가 막히게 잘 자거든. 엄마는 지금 이 시간까지 안 자는 너희가 제일 무서워."
"......"
복복이는 종종 염소 같은 목소리로 무서운 꿈 꿀 것 같은 기분이 든다며 안아달라고 한다. 나도 처음부터 이렇게 대답한 건 아니다. 하지만, 자주 반복되는 말에 이제 그런 일은 없다고 잘라 말한다. 무서운 꿈은 절대 꾸지 않을 거라고 장담할 수 없는 장담을 한다. 무서운 꿈을 꾸고 나서 얘기하면 달래 보겠는데, 꿀 것 같은 기분 정도는 이제 그냥 둬도 잘 자더라. 남편도 나도 무서운 꿈 꿀 것 같다는 말은 어느덧 놀림으로 승화시킨다. 결국 깔깔거리다 얼른 자라는 말로 하루가 끝난다.
빵빵한 에어컨과 물갈이 때문인지 영 컨디션이 별로라고 하는 남편이 곧 탑승하는 귀국 편 비행기에서 잘 자길 바란다. 지금 막 옆 방에서 소리 없이 잠든 아이들이 내가 장담한 것처럼 무서운 꿈 꾸지 않고 혹은 꾸더라도 잠설치지 않고 키만 크길 바란다. 부모님들, 친구들, 오늘 우연히 만난 아는 엄마들까지 떠올리며 모두가 꿀잠 자길 기도해 본다. 최애가수도 본인이야말로 잘 때 잘 자길 바란다. 내가 떠올릴 수 있는 모든 이들이나 떠올릴 수 없는 존재들이나 모두 잘 잤으면 좋겠다. 뻥 조금 섞자면, 인생은 어쩜 잠만 잘 자도 살만하다니까?! 기분도 어쩐지 좋고 서로 화도 덜 나고 그럴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