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어머니들

상대적으로 가녀린 느낌의 나

by 미미

보름 전에 친한 동생이 둘째를 낳았다. 그리고 또 다른 절친은 가을에 둘째 출산을 앞두고 있다. 종종 결혼, 임신, 출산, 육아의 과정을 살짝 앞서간 나에게 부러움이 쏟아진다. 무엇보다 그만큼 키워놔서 너무 부럽다는 이야기. 나도 시간을 되돌린다고 하면 소름이 돋을 지경이니 그럴 만도 하다. 그래도 어느덧 친구들과 이런 이야기를 하며 공감할 수 있다는 게 새삼 감동이다. 이제야 미국에서의 4년을 돌아보면 내가 괜히 스스로를 유독 체력 떨어지고 몸과 마음이 건강하지 못한 부족한 엄마로 느꼈구나 싶다.


둘째를 낳기 전, 툭 튀어나온 배를 잡고 첫째와 다니던 뮤직클래스. 하루는 한 엄마가 카싯을 팔뚝에 걸치고 나타났다. 미국에서 흔히 보는 모습이지만 저 무거운 카싯을 어떻게 토트백 마냥 팔에 걸고 다니는지 나는 그 장면이 늘 신기했다. 속으로 팔뚝에 철심을 박았나 생각하며 그 엄마에게 미소로 인사를 건넸다. 선생님은 자연스레 카싯 속 둘째가 몇 달 됐는지 물었고, 그녀는 대답했다. 한 달이라고. 응? 그녀와 그녀의 첫째 아들과 몇 주 째 수업에 함께하고 있던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 저 엄마는 아기 낳고 1주 만에 여길 나오기 시작했다는 게 아닌가. 몸은 괜찮냐고 물어볼 뻔했는데, 놀라면 나만 이상한 사람이 될까 싶어 미소를 머금고 입을 다물기로 했다.


난 첫째를 일명 "생"으로 낳았다. 산통을 쥐뿔도 모르면서 그냥 그러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무통주사를 맞지 않았는데, 덕분에 회복이 가능한 걸까 싶을 만큼 거하게 상처를 입었다. 이 일을 교훈 삼아 둘째 때는 산부인과에 무통주사 꼭 맞을 거라고 미리 얘기했다. 의사는 당연한 거 아니냐는 반응이었다. 그렇게 천국을 맛보리라 다짐하고 다짐했건만 의외로 무통주사는 아무나 맛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진통이 오자 시간 텀을 체크하며 최대한 참다가 응급실로 향했는데 병원에 도착했을 때 이미 자궁문은 거의 열려 있었다. 아, 타이밍을 놓쳤어. 생명줄 같은 버튼을 쥐어준다는 일반적인 무통주사 대신 딱 한방 맞기로 합의했다. 마취과 의사는 정신없는 산모의 귀에 또렷하게 말해주었다.


“이거 원하면 놔줄 수는 있는데 너무 늦어서 효과를 전혀 못 볼 수도 있어. “

“그래도 맞을래. 아악, 빨리 놔줘.”


아픈 중에도 기대만발. 남편 말에 의하면 그 한방의 주사도 의사가 버벅거리다 주사기 떨구고 어쩌고 하며 늦어졌다고는 하지만, 막판에 스치듯 찾아온 무통 타임은 나의 무난한 출산에 일조했다. 이번엔 첫째보다 순산했다며 싱글벙글했지만, 나의 관절과 마디마디는 또다시 삐그덕 댔다. 어깨, 허리, 무릎 등 고생 좀 했다는 부위들은 죄다 출산의 훈장을 달고 삐그덕. 하루가 다른 몸으로 아이들을 보다 보니 미국의 엄마들은 내게 신기한 존재였다. 출산이 무슨 코 푸는 것도 아닌데 다들 몸이 괜찮은 겁니까?


세상에 나와 꺼이꺼이 우는 우리 둘째와의 첫 만남.


돌이 넘을 무렵까지 둘째의 카싯은 늘 유모차에 끼워 이동했다. 차에서 카싯을 빼다가 유모차에 끼우는 것도 큰 숨을 들이마시고 허리 나갈까 걱정되어 없는 코어 근육을 끌어다 잔뜩 용써서 실행한다. 출생 후 첫 몇 달 만에 형아의 돌 몸무게를 찍은 둘째는 카싯에 무시할 수 없는 무게를 더했다. 집에 있기엔 에너지가 넘치는 첫째의 몸살에 비실대며 외출을 일삼던 나의 손목과 허리는 그 부담을 고스란히 나눠졌다. 정신 차려보니 입에 아이고 소리가 붙어있었다.


여기저기 유모차를 세워두는 나와 달리 조그만 아기를 한 팔에 덜렁덜렁 들고 있거나 카싯을 가방처럼 든 엄마들을 어디서든 쉬이 볼 수 있었지만, 그건 내 힘과 근육이 소화할 수 있는 영역 밖에 있는 일이었다. 백인 어머니들과의 거리감은 희한하게도 그런 데서 왔다. 막상 얘기를 나눠보면 별 거 없다. 간밤에 애가 1시부터 6시까지 안 자고 칭얼댔다며 고개를 내젓고 애들이 낮잠을 안 자면 휴식시간이 사라질까 전전긍긍하는, 그냥 나랑 비슷한 존재일 뿐이다. 그럼에도 그녀들의 팔에는 내가 모르는 장치가 숨겨진 듯했다. 첫째들이 체육수업 중일 때 나와 나란히 아기띠를 하고 서있던 애슐리에게 말했다.


“난 출산하고 몸의 마디마디가 아파.”

“운동하고 싶은 거야? 운동하기 좋은 계절이지!”

“그래..”


내가 어디 아프다 말을 꺼내보지만, 나도 어디가 아프다 반응하는 엄마들은 만나지 못했다. 결국 내 컨디션에 대해 솔직한 말을 꺼내 공감할 이를 찾기 어려워 결국 입을 다물곤 했다. 그 뒤에는 사실 하고 싶은 말이 적어도 이만큼은 더 있었다.


‘애슐리, 난 어깨와 허리와 팔이 아파서 도저히 카싯을 들고 다닐 수가 없어. 심지어 수유할 때 자꾸 발끝에 힘을 줘 세웠더니 이제 발가락 마디도 아프단다. 넌 지난달에 낳은 둘째를 그렇게 한 팔로 들고 다녀도 안 아프니?’


산후에 몸을 회복함에 있어 동양인의 신체조건과 체질이 대체로 서양인과 다르다는 이야기는 흔히 접할 수 있다. 물론 서양인 중에서도 산후 건강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나 동양인이지만 근력 좋고 골반 튼튼한데 아이 머리까지 몹시 작은 경우는 다른 얘기가 될 수 있겠다. 게다가 이런 얘기도 근거가 있네 없네 찬반이 나뉘곤 해서 산후조리원이 필요하네 과하네 하는 논란까지 벌어지기도 한다. 그렇지만 뭐든 개인차는 통계를 무시하는 법이다. 중요한 건 지구 어느 대륙이든 임신과 출산을 거친 산모는 회복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내 몸과 마음도 내 개별성에 맞는 회복의 과정을 거치고 있었을 뿐이다. 다만, 미국에서 사는 동안 주위를 둘러보면 나보다 몸 튼튼하고 멘탈도 쿨한 엄마들이 많아서 -완전한 자의는 아니고 여건상- 애들을 붙들고 안정애착에 집착하는 듯한 나는 상대적으로 외로웠다. 같이 아이들을 놀리다가도 저녁시간이 되면 각자 흩어지는 주변 엄마 혹은 아빠들의 가족 중심 일상에서 우리 가족만 다른 삶을 사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초보엄마와 고군분투한, 고맙고 미안한 우리 첫째의 꼬꼬마 시절.


“여보, 다음에는 냉장고도 드는 거야?”


언젠가 혼자서 가구를 좀 옮기고 새로 정리했더니 남편이 내게 말했다. 이 글에 앓는 소리를 늘어놓으니 내가 꽤 연약하기라도 한 것 같지만 나름대로 튼튼하다고 자부한다. 애들과 씨름한 해가 더해질수록 나름의 요령이 생겨 힘도 곧잘 쓴다. 그저 상대적인 것이다. 미국에선 말랐다는 소리를 듣기도 했지만, 한국에 오니 앞으로는 그런 얘기 들을 일이 없는 것처럼. 결국 내가 힘들었던 그 시절, 내가 부족하거나 몸과 멘탈이 약해서가 아니라 누군가와 공감을 나누며 하는 육아가 고팠던 게 아닐까 싶다. 요즘 뒤늦게 한국에서 친구들과 나누는 한풀이 같은 대화는 과거의 나에게 작게나마 위로가 됐다.


"나도 둘째 임신 때 그렇게 우울했지 뭐야. 언제는 차에서 그냥 눈물이 터져서 결국 교회도 못 가고 온 식구가 스키장까지 내달렸어. 그리고 나선 낳고 키울 땐 정신없다가 둘째가 돌 되니까 또 확 우울하더라고.”


"나도 첫째한테 화 많이 냈어. 나는 잠이 쏟아지는데 애가 낮잠만 안 자면 그렇게 화가 나더라. 너무 자책하지 마. 엄마도 사람인데."


"남편이랑 딱히 크게 싸운 적이 없었는데 나도 둘째 낳고는 대판 싸웠어. 알고 보니까 내 친구도 그랬다더라고. 다들 고비가 있나 봐. 그래도 풀고 살아야지, 어차피 터지지 않겠어?"


"어떻게 지났나 몰라. 지금이니까 이렇게 말하지 그때는..."


수다도 육아도 끝이 없다. 서로 다독이며 걷지, 사는 게 별 거 있나 싶다. 다 아는 거 말해 뭐해 싶은 뻔한 공감의 말이 누군가에겐 꼭 필요한 순간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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