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따디른 이거 타 내가 혼자 딕쩝 뵨딘해떠요. 우리 이제 뚜박 먹어요? 근데 이완뇽은 한국따람인데 왜 한국을 팔아요? 나는 이둔띤이 좋아요.”
(엄마, 사실은 이거 다 내가 혼자 직접 다 변신했어요. 우리 이제 수박 먹어요? 근데 이완용은 한국 사람인데 왜 한국을 팔아요? 나는 이순신이 좋아요.)
변신시킨 로봇을 가져와놓고 의식의 흐름대로 이순신까지 찾는 둘째는 대답할 시간을 안 주고 재잘거린다. 이 두서없는 이야기를 따라가려면 귀를 쫑긋하고 집중력을 발휘해야 한다. 하고 싶은 말이 물 흐르듯 나오는 천진한 시절. 이렇게 적으니 그냥 혀가 짧구나 싶지만, 아이의 귀여운 말투는 문자로 표현하기 어려운 경지에 있다. 본인은 미간까지 찌푸리며 진지하게 얘기하는데 그 표정과 발음의 환상적인 조합에 자꾸 웃음이 새어 나온다.
“아, 좀 더 말은 잘 듣고 손도 덜 가면서 한 1년만 더 이렇게 귀엽게 말했으면 좋겠어.”
올여름을 보내며 점점 정확해지는 둘째의 발음과 다양해진 어휘를 듣다 보면 머지않아 치명적인 아기의 귀여움을 벗고 어린이스러움을 장착하겠구나 싶어 아쉬운 마음에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몰래 녹음 버튼을 누른다. 아이가 잘 때, 유치원 가고 없을 때, 내 눈 앞에 없을 때, 아이들 목소리를 녹음한 파일을 들으면 갑자기 마음이 한없이 너그러워지며 예쁜 모습들만 떠오른다.
남편은 첫째를 큰 돼지, 둘째를 작은 돼지라고 부른다. 뚱뚱해서는 아니고 먹는 양에 근거한 별명이다. 우리 먹보들의 최애는 과일이다. 둘의 나이를 합쳐도 손 하나면 셀 수 있던 시절, 친한 언니네 집에 가서 국그릇에 가득한 블루베리를 둘이 가만히 앉아 다 먹어버리던 장면이 아직도 생생하다. 우연찮게 이런 아이들을 내 배로 낳은 나는 이들의 먹시중에 인이 박혔다. 하루 종일 먹을 것을 주고 치우고 하다 보면 해가 저무는 느낌이다.
"이야, 잘 먹는다! 돈 많이 벌어야겠네."
우리 아이들이 먹는 모습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짠 듯이 똑같은 말을 하곤 했다. 우리 가족은 미국에서 사는 동안 모든 과일을 코스트코에서 구입했다. 어차피 많이 먹을 텐데 타겟이나 세이프웨이에서 작은 팩을 살 필요가 없었다. 아이들 데리고 장 보러 나오는 것이 얼마나 큰일인데 조금씩 산단 말인가. 아파트에 있는 작은 냉장고는 별 거 늘 넘치기 때문에 한국에서 가져온 김치냉장고와 블랙프라이데이 때 마련한 냉동고를 사용했다.
"너희 둘은 아직 그렇게 작은데 이렇게 많이 먹는 게 가능한 거야?"
늘 놀기 바쁜 아이들이라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장을 볼 때마다 김치냉장고에 과일을 채워 넣으며 아이들에게 묻곤 했다. 아이들이 어디 기관이라도 다니면 혼자 적당히 장을 보겠는데 이 녀석들은 같이 장보며 와인을 제외하고는 모든 시식도 빠뜨리지 않고 자기들 먹고 싶은 거 고르며 카트의 목적지를 훈수 두느라 여념이 없었다.
costcobusinessdelivery.com
"아, 또 수박이 나오기 시작했어."
"그러니까..."
카트를 휙 돌려 다른 길로 돌아가며 남편과 나는 아이들 몰래 속삭인다. 유독 수박 손질이 귀찮았던 우리는 수박의 등장이 마뜩잖았다. 그래도 가격이 $4.99~$5.99를 찍는 한여름이 되면 갈 때마다 하나씩 들고 오긴 했다. 만원도 안 하는데 코스트코 수박은 크기도 엄청나게 커서 큐브 모양으로 썰어낸 수박을 차곡차곡 담고 또 담고 하다 보면 그릇이 늘 부족했다. 줄줄 흐르는 과즙을 닦으며 이미 옆에서 침 흘리는 아이들 입에 하나씩 넣어주며 수박을 썰고 나면 대업을 마친 듯 기운이 쏙 빠지곤 했다.
미국 수박의 엄청난 장점 하나는 수박에 씨가 없다는 건데 아이들에게는 서운한 일이었다. 자연관찰책 수박 편 마지막 페이지를 보면 다 같이 얼굴에 씨 뱉기 게임을 하라고 되어있는데 뱉을 씨가 없기 때문이다. 한국 동화책에는 수박씨가 흔히 나오다 못해 애들이 수박을 놀이동산 삼아 놀다가 수박씨를 심으러 가기도 하는데 빨갛기만 한 수박 속이 아이들 입장에서야 얼마나 허전했을까.
자연이 통통 <커져라, 수박!> by 이세나, <수박 밭에서> by 이시무라 지에
"하하, 이 책은 왜 이런 게임을 권했을까? 엄마는 하마터면 카펫에서 수박씨 주우러 다닐 뻔했네?"
"엄마, 나도 이거 해보고 싶어요."
"미국에서는 못 하니까 (다행이지 뭐니) 한국 가서 수박 먹게 되면 해보자."
씨가 없을 뿐 아니라 한국 수박보다 10배는 달았던 미국 수박은 여름이 끝나도 한동안 나왔다. 제철과일이 명확한 한국과 달리 미국은 미국 땅에 계절이 다양한 만큼 과일의 시즌도 길었다. 가격이 좀 오르기 시작하면 그제야 수박 철이 곧 가나보다 했다. 그리고 안도한다. 아, 이제 한동안 수박 손질은 안 해도 되겠다!
한국에서의 여름은 다시금 수박 손질로 시작되었다. 참외도 있고 복숭아도 있으니까 수박은 아직 안 먹어도 좋다고 생각하며 망설이고 있는데 시부모님 방문으로 수박이 생겼다. 얼마 안 있어 친정부모님도 수박을 안겨주셨다. 여름에 수박 손질은 피할 수 없는 운명임을 받아들이고 며칠 바닥에 굴러 다니던 수박을 잘라 보기로 결심했다. 쩍 갈라보니 수박씨가 줄 서있다. 씨를 보고 환호하는 아이들. 사방으로 수박씨가 튄다. 동화책에서처럼 보트 모양으로 잘라달라는 아이들에게 긴 수박을 잘라주었다. 역시나 아이들의 턱과 볼과 팔을 타고 줄줄 흐르는 과즙을 닦아주고 남은 수박을 토막 썰기 한다. 전쟁 같은 수박체험을 마친 아이들을 대충 씻기고 다시 돌아온 식탁 일대에는 온통 단내가 난다. 아, 게다가 수박 껍질이 음식물쓰레기다. 평소에 쓰는 2L짜리 봉지로는 감당할 수 없어서 쓰레기봉투를 사러 나섰다.
어떤 주스 가게에서는 수박을 썰어서 수박 도시락으로 판다고 하니 수박은 분명 혼자 썰어먹긴 부담스러운 과일이지만 집에 과일 킬러들을 다수 보유한 나는 한국에서 먹는 소박한 사이즈 수박은 소진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나는 좋아하지 않지만 아이들이 좋아하는 수박을 그릇에 담아두면 간식 한 가지 생겼다는 생각에 든든하다.
이번에 수박을 사면 오랜만에 수박 흰 부분과 냉동딸기를 갈아 주스를 만들어보려고 한다. 청량한 맛이 좋아서 신혼 때 자주 만들어 먹었던 주스다. 아이들을 키우면서는 먹시중에 지쳐 능동적으로 일을 더하고자 하지 않았는데 요즘 나는 조금 달라졌다. 이렇게 앉아서 끄적이기도 시작하고 내가 좋아하는 스콘을 굽기도 하고 이렇게 예전에 좋아했던 주스 갈 궁리도 한다. 아이들이 자란 만큼 나도 자라고 있나 보다.
"적당히 먹자, 얘들아. 엄마가 나눠준 만큼만 먹고 오늘은 끝!"
더 크면 얼마나 잘 먹으려고 그러는 거야? 이 녀석들은 늘 먹고 싶은 게 있는 게 꼭 내가 임신했을 때 같다. 첫째가 수박을 주문했고, 둘째는 자두를 주문했다. 더불어 주스용 냉동과일을 주문하며 우리 집 마지막 뚜박의 계절이 간다. 아무래도 내년에는 수박이 되겠지. 섭섭하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