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럭저럭 키우자는 마음

너와 내가 편안한 방법

by 미미

아티스트 웨이. 내 전공과 거리가 멀지만 마침 타과에 열려 있었던 건축과의 친절한 수업에서 처음 접한 책이다. 예술가의 길이라니 멋짐이 폭발하는 제목이지만, 역시 예술가의 길은 닦인 길이 아니라 쉽지 않다. 매일을 깨우는 모닝 페이지라니... 밤샘이 잦던 시절, 모닝 페이지는 비현실적인 과제였다. 한마디로 그 수업은 헬이 되었다. 그럼에도 그 이후 나의 삶에서 모닝 페이지를 다시 하겠다는 발상은 몇 년에 한 번씩 찾아오는 일종의 병 같은 것이다. 마치 듣도 보도 못한 나의 숨겨진 자아가 짠 나타날 것 같은 행복한 상상 말이다. 그렇게 이 책은 여섯 번의 이사 가운데 여태껏 버려지지 않고 나와 태평양도 건너갔다 왔다.


아이들에게 매여 살다 타이핑마저 어색해진 어느 날, 내게 남은 글감이 과연 있을까 하고 갸우뚱하며 그 책을 펼쳤다. 아침을 깨울 자신은 없는데 하면 진짜 좋을 것 같은 일. 마치 다이어트랑 닮은꼴이다. 글감이 주렁주렁 달린 나무가 되고 싶은 나를 직면하게 하는 알람이랄까.


나의 마흔은, 나름 깔끔한 집 관리자(?)가 되고 싶고, 나쁘지 않은 엄마가 되고 싶고, 경제적으로 기여하는 사회의 일원이 되고 싶다는 고민만으로도 피곤한 시절이다. 내 목표가 정말 목표인지 이 방향이 의무감에 따라가는 무의미한 과정인지 헛갈리기 시작하는 즈음이기도 하다. 하고자 하는 일을 하려면 아이들은 각자 알아서 놀고 학습하고 난 내 시간을 최대한 벌고 싶다는 생각이 앞섰다. 그래서 그게 내 뜻대로 되지 않으면 아이들에게 짜증이 났다. 아이들이 마치 내 시간 도둑처럼 보이는 날이 늘었다.


슬슬 한글을 배우고 싶다고는 말하지만 첫째와 달리 그다지 집중할 의사가 없는 둘째를 어떤 방법으로 가르쳐줄까 생각하던 중에 우연히 오은영 박사의 영상을 보았다. 폰을 충전기에 끼운 채 유튜브를 틀어놓고 귀로 대충 들으며 평소처럼 분주하게 움직이다가 갑자기 멈췄다. 스페이스바를 툭 누르고 다시 듣고 싶은 부분으로 조용히 돌아가 들었다. 한글 공부와 비할 수 없는 중요한 이야기이자 일종의 위로가 다가왔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냥 인생과 삶을 그냥 물이 흘러가듯이...

물은 약간 위에서 아래로 흐르고요.

물결이 흘러가듯이 흘러가다 보면 나중에 강으로 갔다가 바다로 가고요.

약간은 돌이 있으면 돌아가요, 물이.

(중략...)

참 어려운 얘긴데 애를 쓰면서 물결이 흘러가듯이 좀 살아봤으면.

아이를 키울 때도 그런 마음으로.

왜냐면 궁극적인 목표는요. 난 그렇게 생각해요.

아이가 그냥 마음이 좀 편안하고, 그럭저럭.

언제나 행복하진 않아요.

주변에 아주 가까운 사람들하고 좀 그냥 그럭저럭 잘 지내면...

난 아이를 잘 키웠다고 생각해요.

(중략...)

오늘 한마디를 해줬다고 얘 인생이 막 확 깨달음을 얻고.

내가 얘한테 오늘 말을 실수했어.

그런다고 얘가 인생이 망가지고 그렇게 생각하지 말고.

안정감을 가지고 애를 봤으면.

(출처: 오은영 TV https://youtu.be/ncoafHXFGBw )


이 영상은 내 한 마디에 애 삶이 막 바뀌거나 인생이 망가진다 생각하지 말고 안정감을 가지고 애를 보면 좋겠다는 이야기로 끝났다. 참 어려운 얘기라면서 늘어놓은 오은영 박사의 이 말들이 되려 명쾌하게 마음에 왔다. 너무 연연하지 않는 것과 사람들과 그럭저럭 지내는 것 말이다. 요즘의 내 숙제였다는 걸 깨치는 순간이었다. 누군가를 볼 때 집착이든 연민이든 그 감정의 무게가 어떻든 너무 무겁게 해결 못할 숙제처럼 들고 있지 않았나 싶었다. 이제 조금은 털고 가벼이 할 때가 아닐까.


영어학원은 애초에 갈 생각이 없는 첫째는 집에서 혼자 온라인 프로그램을 조금씩 하곤 하는데 역시 자발적으로 꾸준히 하기엔 어려운 점이 많다. 어쨌든 언어는 안 쓰면 잊으니 아는 수준은 유지해주자는 생각인데 각종 예체능 수업에 하고 싶다는 방과 후 수업 몇 개 들으면 시간이 없어 영어는 뒷전이다.


"앞으론 엄마가 같이 앉아서 이렇게 할까?"

"네, 너무 좋아요."


오늘은 아예 설거지를 미루고 아이 옆에 붙어서 같이 영어 프로그램을 봐주는데 녀석 혼자 할 때보단 역시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의 의사를 물으니 엄마랑 하고 싶다며 해맑게 웃는다. 엄마랑 하면 뭐든지 좋다는 눈빛이다. 혼자 하게 두고 내 할 일을 하면 내 시간은 좀 아끼겠지만, 놀이든 학습이든 아직은 엄마와 함께 하는 게 제일이다.


설거지가 정말 말도 못 하게 쌓여있고 옷 정리도 하다 말아서 까마득한데 오늘 저녁은 어쩐지 너그럽고 평온한 마음이 들었다. 마치 예전의 육아처럼 내 시간을 좀 더 많이 들이고 몸이 좀 피곤하더라도 마음이 편안한 방법을 따르는 것이 정말 손해일까 싶었다. 어쩌면 현재의 상황에서 그게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게 아닌가. 없는 시간을 내려다 화가 내는 것보다야 서로 유익한 길일 것이다. 거실에 널브러진 나무블록들도 오늘따라 가장 우리 집 다운 풍경으로 보였다.


축구가 끝난 첫째와 하원 하는 둘째를 나란히 픽업해 잠시 동네 마트에 들렀다. 엘리베이터에서 재잘거리는 애들 머리를 양손으로 쓰다듬고 있는 내게 한 할아버지가 물으셨다.


"아들만 둘이에요?"

"네."

"......"

"......"


어르신들은 보통 저 질문에 이어 딸이 있어야 한다는 말로 끝내시는데 오늘은 질문만 오고 거기서 끝이다. 속으로 대답한다. 괜찮아요. 괜찮다고요. 얘네 둘이 얼마나 잘 논다고요. 코로나 시국에 아들 둘 나쁘지 않아요. 심하게 뛰지만 마침 전원주택이기도 하고 말을 좀 안 듣긴 하는데 이 정도면 애들도 착한 편이거든요.


어쩌면 내가 오늘 특히 좀 괜찮다. 모닝 페이지는 한 줄 쓰기로 시작해보려고 한다. 너무 머리 아프도록 애쓰지 않아도 날 위한 변화를 가져올 방법은 분명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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