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통밀국수
모든 것이 새롭게 소중한 순간
난 이미 아점을 배불러 먹은 후였고 더 먹는 건 과식이 분명했지만 국수 그릇을 받아 들었다. 맑은 국물의 국수를 좋아하지 않지만, 어쩐지 먹어야 할 것 같았다. 엄마가 끓여주는 국수 한 그릇도 그저 너무 귀하게 느껴졌다. 요즘 나의 마음은 그러하다. 특히 지난 몇 주, 엄마의 모든 것이 더 귀해졌다.
일주일 넘게 심한 두통에 시달리던 엄마는 아빠와 함께 MRI와 MRA 검사를 받으러 가셨다. 엄마의 건강은 혈압과 당 수치 때문에 관리가 필요했고, 두통도 제법 흔히 있는 일이라 설마 하는 마음이 컸다. 하지만, 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중이라는 엄마의 카톡에는 어쩐지 긴장감이 느껴졌고, 알 수 없는 불안함에 나도 멍하게 연락을 기다렸다. 알람에 맞춰 아이들 라이드에 오가면서도 마음에 시끄러움이 가득했다. 집에 오시기까지 결과를 묻는 내 카톡에 별 대답이 없으신 엄마를 보니 뭔가 좋지 않았구나 싶어 더 캐묻지 못했다.
엄마의 MRA 검사 결과, 뇌동맥류가 발견됐다. 사실 들어본 병명이지만, 눈앞이 깜깜해졌다. 뭔가 자리에 가만히 앉아있기가 힘들었다. 컴퓨터 앞에 앉으면 온통 검색과 걱정으로 가득해졌고 그 외의 모든 것이 부질없게 느껴졌다. 그래서 양배추를 썰든, 버섯을 갈든, 빨래를 데크에 널었다 걷어서 다시 방에 널었다 하든, 쓸데없이 에너지를 썼다. 덕분에 어떤 날은 아이들 사이에 누워 뻗어 버렸고, 잠들지 않은 어떤 날은 깊이 슬퍼졌다. 엄마는 아빠 평생에 친엄마보다 더 의지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 단 한 사람이다. 내가 전혀 알아볼 수 없는 화면 속 구불거리는 혈관에 무언가 문제가 있음이 화살표로 표시되어 있었다. 검사 결과를 판독할 수 있는 아빠에게 저 화살표들의 더 자세한 의미를 묻고 싶었지만, 겁이 나서 묻지 못했다. 그리고, 며칠 후에야 집 앞 공원을 거닐며 엄마의 상황을 설명하다 눈물을 터뜨린 아빠의 모습은 내게 더 큰 두려움을 일으켰다.
병원에서 보냈던 열일곱 그 시절에도 내 스스로의 죽음에 대한 공포는 있었지만, 이번 것은 그보다 훨씬 더 두려운 것이었다. 흘러간 시간이 아까워 어쩔 줄 모르겠고, 늦었다는 후회가 앞섰다. 미국으로 떠날 때만 해도 나중에 아기가 좀 크면 엄마와 브런치를 먹으러 다닐 수 있지 않을까 했지만, 막상 귀국해서 만난 엄마는 당 수치가 자꾸 올라 관리하느라 좋다는 음식과 운동으로 분주하셨다. 항상 또래에 비해 젊어 보이셨던 부모님은 어느새 더 히끗해진 모습으로 우리를 반기셨다. 그러고 보면 대부분의 인간이 하는 계획이 참 늦되지 않나 생각한다. 세상은 늘 빠르고, 늦된 계획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두 녀석과 치과를 갔다가 늦게 돌아온 저녁, 첫째는 멀미했다며 나를 독촉하고 둘째는 차에서 자다 깨어 괴성을 지르는 생떼를 선보였다. 지친 나는 참을 인 자를 수백 번 마음에 새겨야 했다. 모든 상황이 잠잠해지고 재울 채비가 끝난 후, 굿나잇 인사를 건네러 1층에 내려갔다. 엄마는 아직 강렬한 생떼의 기억에 고개를 내저으시더니, 장난스럽게 우는 흉내를 내면서 둘째에게 얘기했다.
"어우, 할머니가 눈물이 났어. 할머니 딸이 불쌍해서! 엉엉."
"(히죽히죽)"
"할머니 딸 힘들게 하면 가만두지 않을 거얏!"
"(깔깔깔)"
둘째는 재밌다고 웃어댔지만, 나는 어쩐지 눈가가 촉촉해졌다. 이만큼 나의 힘든 순간들을 일일이 마음 아파할 이가 세상에 또 있을까? 언제든 돌아갈 세상의 유일한 보호소 같다는 생각을 했다. 거스를 수 없는 시간에 낡아지는 나의 집이 참 아프다. 수시로 울컥하는 마음에 애쓰게 된다. 하루가 천년 같은 기다림 끝에 내일 대형병원 초진을 앞두고 심장이 쿵쾅거려 마음을 가라 앉히려고 노트북을 켜고 앉았다. 검사를 더 해야 하고 당장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나거나 결과가 나오는 것도 아닐 텐데 떨린다. 빨리 신경외과 진료를 봐야 하는데 싶어 그렇게 기다리고도, 막상 닥친 내일이 두렵다.
마침 친정 부모님과 위아래 층에 살게 된 올해가 참 다행이다. 이 선택에는 여러 가지 다른 이유들이 있었지만, 어쩌면 내가 모르는 다른 이유가 있었을는지도 모른다. 앞으로 하루 이틀에 끝나지 않을 걱정의 시간들이 되려 모든 순간을 소중하게 만들어 주리라 믿는다. 비록 수시로 울컥하고 애쓰는 마음이지만, 우리 가족의 매일에 감사와 기쁨이 있길. 그렇게 오늘도 엄마의 치유를 간절히 소망하고 기도한다. 다음부터는 오늘보다 더 안도하며 엄마와의 일상을 기록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