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씨까지 귀여운 과일
이번 설 연휴는 펑펑 내리는 눈으로 시작했다. 첫날은 어디 가지 않아서 명절을 대비해 냉장고 털이에 나섰다. 빠른 소비를 위해 마침 냉장고를 차지한 황금향을 까서 통에 담았다. 어릴 적 좋아했던 겨울의 낭만이자, 거실 바닥에 앉아 TV를 보며 까먹는 다정한 과일. 한입에 하나를 통째로 쏙 넣어 먹곤 했다는 먹짱 남편과 달리 나는 어릴 때도 늘 한 조각씩 귤락을 두루두루 손보고 가끔은 느릿하게 껍질도 벗겨먹었다. 엄마가 까주면 아주 좋고, 내가 까면 좀 힘든 귤 까기. 하지만 느림이 미덕이 아닌 세상이라 어떤 부분에선 유독 느림보인 나는 겨울이 어렵고 시리다.
나는 귤을 떠올리면 어릴 적 위층인지 아래층인지 같은 건물에 살던 이웃 아주머니가 떠오른다.
어릴 때 기억이니 아주머니라기엔 많이 젊었을 수도 있고 우리 집처럼 같은 집에서 세를 살던 이웃일 수도 있고 집주인이었을 수도 있겠지? 어쨌든 불의의 사고로 잃으셨으리라 추측되는 손가락 하나. 그분 손에는 손가락이 하나 없었다. 그래서 난 그분의 귤 까는 모습을 세상 신기하게 보던 기억이 난다. 이상하게도 그 기억은 어쩐지 엄청 따뜻하다. 뭐, 내겐 그 장면뿐이니 이유는 잘 모르겠다. 그냥 그 귤 먹던 시간이 오손도손 즐거웠을 수도 있고 그분이 내게 귤을 까주셨는지도 모른다. 내게 기억이라는 건 사진 같은 장면이기에 앞서 그냥 속 어딘가의 온도가 바뀌는 느낌이라서 몰캉한 귤을 쥘 때 꽤 자주 그 다정한 느낌을 받곤 한다.
아무리 여름이 더워도 겨울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추워핑인 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빼고는 차가운 게 다 싫다. 차가운 바람, 차가운 말투, 차가운 분위기, 그리고 차갑다는 말. 아주 가끔 내가 아이들에게든 누군가에게든 차가울 때도 내 스스로가 너무 싫어지는 이유다. 요즘의 내가 마시는 공기는 어딘가 좀 차고 서늘하다. 크게 벼락을 맞아서가 아니더라도 여러 가지 개인적 상황이 얽힌 탓이다. 웃고 울고 다 하는 일상 속에 있음에도 여전히 숨이 답답해 애써 큰 숨을 쉬어야 살 것 같다. 스트레스는 사정을 봐주지 않는다. 단어의 생김부터 다정하지 않다고나 할까?
다정한 말과 분위기를 애정한다. 같은 말도 다정한 말투로 하는 게 좋고 듣는 게 좋다. 그러고 보니 내가 취향으로 꼽는 것들은 죄다 귀엽거나 다정한 세상의 모든 것이다. 사람이든 캐릭터든 물건이든 글씨든 소리든 귀엽고 다정함은 내 삶에 활력이다. 귤도 다정하다. 아무래도 귤을 추운 벌판에서 먹진 않으니까 귤에 담긴 기억은 따뜻한 방바닥과 나름 여러 개 연달아 먹는 풍성함 같다. 블루베리나 체리처럼 색이 진하게 남지도 사과처럼 단단하지도 딸기처럼 예쁘지도 않지만, 귤을 떠올리면 마음이 묘하게 다정해진다. 담긴 장면 장면이 다 마음에 든다. 차가운 겨울에 함께인 그나마의 다정함인 귤은 글씨의 생김까지 귀엽다.
귤. 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