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 속에서 흐르는 것들:

자카르타에서

by lea


​‘지금까지’를 온전히 받아들일 때, 비로소‘지금부터’가 시작된다.
​자카르타의 도로는 1년 365일 거대한 정체 상태에 놓여 있다.

우리 집은 시내 중심부에 위치해 어디로든 이동하기 좋은 입지적 조건을 갖추고 있지만,

이 도시의 교통 체증 앞에서는 그런 물리적 우위조차 무력해지기 일쑤다.

남편의 사업장은 자카르타에서 북서쪽으로 57km 떨어진 ‘땅그랑(Tangerang)’에 있다.

막힘없이 달린다면 한 시간 남짓 걸릴 거리지만, 땅그랑을 오가는

고속도로는 차들의 거대한 전시장 혹은 주차장을 연상케 한다.
​땅그랑에서 시내로 돌아오는 길은 기본이 두 시간이다.

운 좋게 한 시간 반 만에 도착하면 '오늘은 꽤 일찍 왔군' 하고 안도하게 된다.

남편은 매일 그렇게 길 위에서 세 시간 넘는 시간을 보낸다.

일종의 고단한 수행과도 같은 출퇴근의 반복이다.


​게다가 이곳의 고속도로는 한국의 매끄러운 포장도로를 상상한다면 곤란하다.

아스팔트가 어찌나 허술한지 포장도로인지 비포장도로인지 경계가 모호할 정도다.

선택지는 오직 두 가지뿐이다.

끈적이는 아스팔트냐, 메마른 흙바닥이냐.


***


​문득 궁금해졌다. 한국이나 싱가포르, 일본의 도로는 밝은 회색빛을 띠는데

왜 인도네시아의 도로는 유독 검은색일까.

그것은 시공법의 차이, 즉 강성 포장(Concrete)과 연성 포장(Asphalt)의 차이에서 기인한다. 아스팔트는 재료 특성상 열에 취약하고 무르다. 연중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동남아시아에서 아스팔트는 효율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값싼 재료와 허술한 시공이 만나 도로 위엔 깊은 골이 파인다. 이른바 '소성 변형'이다.
​그 울퉁불퉁한 길 위를 달리는 차 안에서의 체감은 근대적인 자동차라기보다 덜컹거리는 마차에 가깝다. 그리고 그 진동은 고스란히 몸으로 전달되어 관절 마디마디를 뻐근하게 만든다.

어느 대도시나 마찬가지겠지만, 인프라가 집중된 자카르타의 인구 밀도는 비정상적으로 높다. 수치상으로는 서울과 비슷할지 몰라도, 지하철은 없고 대중교통 버스는 너무나 적어 있는지조차 모를정도이기 때문에 도로를 가득 메운 오토바이 부대와 마비된 교통 상황이 주는

시각적 압박은 서울의 서너 배를 훌쩍 뛰어넘는다.


​그럼에도 이 도시에서 한 가지 훌륭한 점을 꼽으라면, 어디를 가든 나무와 풀이 무성하다는 것이다. 눅눅한 열기 속에서도 초록은 제 몫을 다하며 아이러니하게도 자연의 숨결을 전한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산림 보호에 꽤나 엄격해서, 깔리만탄(보르네오) 같은 섬에서는 나무 한 그루도 함부로 벨 수 없다. 그 울창한 녹지들이 삭막한 도시의 숨구멍이 되어준다.


​어찌 되었건 자카르타의 삶은 정체와 정체 사이를 흐르는 인간 군상의 집합체다.

만약 거리에서 그 흔한 오토바이가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분명 폭동 같은 큰일이 벌어졌다는

징조일 것이다.




​우리는 정체라는 거대한 멈춤 속에서도 각자의 방식으로 흐른다. 남편은 이 나라에서 사업을 하고 나는 이 자연에서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쓴다.

그 안에서 세밀하게 관찰하고 통찰을 키우다 보면, 비로소 내가 왜 이곳 자카르타에 살고 있는지,

그 선택의 이유를 어렴풋이 알게 된다. 정체를 받아들이는 순간, 나의 '지금부터'는 다시 시작되는 것이다.

매일 아침 눈을 뜨는 순간 '몰려오는 통증'들을 유연하게 받아들이는 법을 배운다.

정수리 맨 위쪽부터 발바닥 뒤꿈치까지 타고 내려오는 통증을 순환의 과정이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좋은 천연 영양제와 미약하지만 작은 몸짓으로 운동과 수영을 통해 나를 체인지하고 있다.


만약, 한국에서였다면 절대 절대로!

내 몸을 더 세심하게 관찰하고 보살피는 공부는 없었을 것이다.

독한 약에 의존하며 뇌를 마비시키고 그저 바쁘게 몸을 막 굴리며 그렇게 보냈을 거라는 것을 잘 안다.




이것이

한 걸음 더 나아가기 위하여 내가 이곳에 사는 이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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