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증의 예절 그리고 치유
태양의 그림자와 통증의 예절
자카르타의 햇살은 늘 과잉이다. 지나치게 찬란한 그 빛 아래 서 있으면
역설적으로 나의 소외는 더욱 선명한 윤곽을 드러내곤 했다.
어떤 날은 그 지독한 고독을 견디지 못해 심장을 가장 차가운 온도로 얼려두었다.
그렇게 얼어붙은 감정의 파편들을 화폭 위에 흩뿌리며, 나는 그것을 ‘자연의 생명력’이라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그 그림을 그리는 나의 내면은 소리 없이 마모되어 가고 있었다.
오랫동안 나는 육체의 신호를 무시해 왔다.
만성 통증과 멋대로 춤추는 자율신경은 나의 통제권을 벗어나 있었지만,
나는 그것을 다량의 수면제와 신경안정제, 그리고 즉각적인 효과를 내는 독한 항생제들로 억눌렀다. 약물로 감각을 마비시키는 것은 고통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이 보내는 정중한 편지를 읽지 않고 쓰레기통에 처박는 일과 같았다.
일종의 기만이었다.
어느 날 문득, 지난 수십 년간 나를 갈아 넣었던 일중독과 잘못된 습관들이 내 몸을 어떻게 망가뜨려 왔는지를 깨달았을 때, 나는 깊은 수치심을 느꼈다.
그것은 씁쓸한 자각이었으나 동시에 기묘한 해방감이었다.
“아, 이래서 이런 거였구나.”
비로소 나는 독한 약들을 하나씩 끊어냈다.
끊어내는 즉시 몸의 반응은 더욱 나를 흔들고 쥐어짜고
마치 소금통에 빠진 뱀처럼.
비늘이 하나둘씩 벗겨지고 벗겨진 생살위로 소금이 스며들어
온몸을 비틀어대며 살려달라고 이건 아니라고 몸부림쳤다.
통증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다만,
'통증을 대하는 나의 예절이 바뀐 것이다.'
이제 나는 통증을 자책의 근거로 삼지 않는다. 대신 그것을 빛을 향해 걷는 법을 다시 배우는 과정이라 믿게 되었다.
어린아이가 처음 걸음마를 뗄 때, 수천 번을 넘어지고 자빠지는 것은 실패가 아니라 ‘배움의 양식’이다.
나의 통증 또한 그렇다.
상한 것을 비워내고 신선한 세포들로 그 자리를 채워가는 치유의 공정(工程)이라 생각하니, 기이하게도 통증은 더 이상 고통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그것은 하나의 생명력이자, 내가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북소리가 되어주고,
통증이 역설적으로 고결하고 우아한 행복의 질감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굳이 타인에게 나의 고통을 구구절절 토로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내 안색과 표정에는 이미 숨길 수 없는 삶의 기류가 흐르고 있었을 것이다.
예전에는 마음의 문을 닫고 차가운 심장으로 살았지만, 요즘의 나는 자주 웃는다. 아니,
매일 활짝 웃으며 걷는다. 모든 것이 새롭고 화창하다.
삶에서 얻은 배움에는 그 어떠한 것도 공짜는 없다.
끊어내기 시작하고부터 매일 하루도 거르지 않고 온몸을 흝어 깡그리 망가뜨려 주겠다고
작정한 듯 통증은
나에게 공짜는 없다고 알려줬다.
만약 내 삶에 이런 너울 같은 파도가 닥치지 않았다면, 혹독함을 느끼지 못했다면, 나는 죽는 날까지 이 단순하고도 명료한 진리를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고통은 나를 파괴하러 온 침입자가 아니었다. 이것은 나를 다시 태어나게 하려고 찾아온 가장
엄격한 스승이었다.
감사하다. 모든 것이 감사하다. 오직 감사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