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와 롤러코스터 그리고:

산티아고의 밤

by lea

이따금 이유도 없이 가슴속에 뿌연 안개가 내려앉을 때가 있다. 그것은 마치 오래된 냉장고 구석에서 피어오른 냉기 같기도 하고, 혹은 내장의 빈틈을 빈틈없이 채워버린 습한 기운 같기도 하다.

이 정체 모를 안개가 지독해질 때면 나는 짐을 꾸려 여행을 떠나거나, 아니면 놀이공원으로 향한다.


놀이 공원에서 수직으로 떨어지는 롤러코스터에 몸을 맡기는 것은 꽤나 훌륭한 '안개 제거법'이다.

비명과 함께 쏟아지는 그 짧은 속도감이 가슴속 구석구석을 시원하게 쓸어 내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아주 찰나의 순간이고, 여행 또한 길어봐야 며칠에 불과하다.

하지만 인생에는 가성비 나 효율성으로는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그 만한 가치가 있는' 짧은 조각들이 분명 존재한다.


밤 하늘을 가만히 올려다보고 있으면 파울로 코엘료의 작품

(The Alchemist)'연금술사' 양치기소년, 산티아고가 떠오른다.

스페인의 평원에서 양을 치던 그가 보물을 찾아 먼 길을 떠났던 것처럼, 나 역시 하늘을 보며 그와

비슷한 주파수의 생각을 공유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지평선 너머에 있는 무언가를 갈망하며 사는 존재 들이니까.


재미있는 건, 시간이 흐르며 나의 여행도 조금씩 그 결을 달리해왔다는 점이다.

젊은 날의 여행이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헤매던 '방황'에 가까웠다면

이제는 나름의 정교한 '방향'을 가진 행위가 되었다.


어느 나라를 가든 국립 미술관을 찾아가 캔버스 위에 박제된 역사를 가만히 들여다본다.

그것은 일종의 목적지에 도달하는 행위이자, 내 안의 안개를 걷어내고 그 자리에 선명한 풍경을

채워 넣는 나만의 의식이다. 내가 이곳에 있다. 는 식의.


내 감정의 실체를 정확히 알게 된 지는 사실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안개가 몰려오면 나는 다시 운동화 끈을 묶거나 롤러코스터의 안전바를 움켜

쥐어야 한다는 것을. 그건 방황이 아니라, 나라는 사람의 목적지로 나아가는 아주 성실한 과정일 뿐이다.

***

최근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내가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응시했던 그 반짝이는 존재들이 실은

별이 아니라 인공위성일 때가 많다고 한다.

수억 광년을 날아온 항성의 빛이 아니라 인간이 쏟아 올린 차가운 금속 덩어리가 태양빛을

반사하며 내는 인공적인 반짝임이라는 것이다.


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일종의 배신감 같은 것이 느껴질 법도 했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리 대단한 일은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것이 스스로 타오르는 거대한 가스 덩어리이든, 궤도를 도는 정교한 기계 장치이든,

나에게 전달되는 '반짝임'의 무게는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그 빛이 내 눈에 닿는 순간,

내가 그것에 얼마나 깊이 몰입하느냐 하는 문제다.

산티아고가 사막에서 길을 찾을 때 의지했던 것이 반드시 고대의 별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그를 움직이게 하고, 그에게 목적지를 상기시켜 주는 빛이 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나에게도 그 반짝임 들은 일종의 길잡이다.

마음속에 안개가 자욱해 길을 잃을 것 같을 때, 나는 하늘의 그것들을 보며 다시금 '방향'을 잡는다.

위성이면 어떤가.

그것은 누군가의 의지가 담긴 빛이고, 나는 그 빛을 동력 삼아 내 앞의 안개를 헤치며

나아갈 뿐이다.

결국 우리는 저마다의 하늘에 떠있는 자신만의 빛을 믿으며,

각자의 미술관으로, 혹은 각자의 롤러코스터로 향하는 법이니까.

***

진짜 중요한 건 대상의 정체가 아니라, 그것을 나만의 '길잡이'로 수용하고 바라보는

유연하고 단단한 나의 마음이라는 것. 그것을 이미 알고 있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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