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구름 아래에서 영혼이 털린 다는 것.

짧은 고난의 행군

by lea

작년 12월 말 자카르타의 크리스마스가 지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짧은 연말을 보낼 요량으로 제일 가까운 비행기 편으로 택한 싱가포르의 여행.

첫날.

정말 맑은 공기에 너무도 황홀했다. 그것은 마치 파란 하늘 위에

떠있는 구름 속에 몸을 뉘어 나의 폐 속에 가득 차있는

자카르타의 매연을 공기청정기로 돌려 순환시키는 듯함이었다.

그곳의 공기는 지독할 정도로 깨끗했고,

하늘은 누군가 정성스럽게 닦아놓은 유리창처럼 맑았고,

구름은 누군가의 잘 정돈된 생각처럼 하얀 솜사탕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시야를 가로막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적어도 시각적으로는 완벽한 풍경이었고 공기도 정직했다.


하지만 문제는 그 '농밀한 공기' 속에 있었다.

그 짧은 50미터 앞을 걷는 것조차 온몸의 에너지가 진공청소기안으로 빨려 들어갈

듯할 정도로 습하고 더웠다. 숨 쉬는 게 이렇게 힘들다니.

이런 습함이 이 나라 사람들은 일상화되어있었다.

오. 마이 갓!


내가 자카르타의 크리스마스를 뒤로하고 싱가포르행 비행기에 몸을 실은 건,

대단한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그저 잠깐이라도 좋으니 이륙하는 비행기의 진동과 지루하게 버티는 일상을

떼어놓고 싶었을 뿐이고 더불어

가까운 이웃 나라라는 점도 적당한 핑계가 되어 주었다.


그곳에서 나는 몇 가지 인상적인 것들을 만났다.

북적이지 않는 차도로, 그리고 국립 미술관에 전시된 멋진 작품들.

특히 식물원에서 마주한 열대 식물들의 조경은 내게 꽤나 깊은 통찰을 할 수 있는

기회로 다가왔다.

인공적으로 짜인 자연이 주는 기묘한 질서 같은 것이 거기 있었다.

그곳에서 나는 수많은 식물들을 사진으로 남겼고

나중에 그림을 그릴 때 매우 풍부한 감성들이 담길 것 같았다.

***

그러나 결국 우리를 굴복시킨 것은 그 지독한 찜통더위였다.

우리는 영혼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 탈탈 털린 듯한 상태가 되어

3박 4일을 버티며 여행을 했고 자카르타로 돌아왔다.

자카르타에 있을 때는 이 더위를 피해 막연히 북쪽 나라에서의 몇 달을 꿈꾸곤 했지만,

싱가포르의 기후를 호되게 경험하고 나니 깨닫게 되는 것이다.

역시 내가 있는 곳, 내 집이 제일 좋다는 지극히 평범한 진리를 말이다.


지금 자카르타는 우기다. 비도 많이 내린다.

한국으로 치면 겨울.

그래도 건기에 비하면 신선한 바람이 불고 기온은 26도에서 28도 사이를 오간다.

이 정도면 꽤 쾌적한 편이다. 매연만 빼면..

싱가포르에서의 경험이 아주 나쁘지는 않았다.

동남아 국가 중에 그렇게 맑고 좋은 공기는 처음이었고

휴양지인 발리조차 매연 때문에 속 타는 상황에서

차별적이고 좀 더 체계적인 도시라는 특별한 경험이었다.

하지만 인간이라는 생명체가 살아가기에는

그 정도의 습함과 더위는 역시 기혹한 것이 아닐까 싶다.

물론, 한국의 겨울이나 알래스카의 극한적인 추위도 그와 비슷한 결을 가진 시련 일 것이다.


다음 주에는 한국으로 열흘간 다녀올 예정이다.

2년 만의 방문이다. 건강검진과 몇 가지 기능검사들이 기다리고 있다.

모처럼의 귀국이라 기대가 되기도 하지만,

열흘동안 하루도 비어있지 않는 빡빡한 스케줄표를

보고 있으면 벌써부터 몸 어딘가가 삐걱거리는 기분이 든다.


아마도 나는 다시 한번 고난의 행군을 하게 되겠지. 한국의 1월 추위와도 싸워야 한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것이 여행이고, 그것이 다시 돌아 올 집을 확인하는 과정인 것을.

바람이라면 건강검진 결과도 깨끗하게 나오고

무리한 일정에도 탈없이 잘 지내다 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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