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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미삐약이 Jan 19. 2021

꼰대를 향하여

꼰대는 교사의 숙명인가.

나는 누군가에게 싫은 소리 하는 것을 죽어도 싫어했다. 그래서인지 여전히 싫은 소리에 능하지 못하다. 싫은 소리를 하는 것도 싫고, 싫은 소리를 하기 위해 감정을 소모해야 하는 나 자신도 싫고, 그러한 상황을 상상만해도 어색하고 불편한 기류가 자동으로 연결되기에 그 상상과 압박감이 감도는 공기는 더욱 더 싫어지는 게다.


2017년의 춥고 매섭던 가을의 어느날, 미국에서의 마지막 회식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내가 졸졸 강아지마냥 잘 따르던 의사선생님께 문득 질문을 던졌다. "피터, 저는 사람들한테 간섭하는 건 별로.. 있어선 안 될 일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인지 아이들이 버릇없거나 제멋대로 굴 때 딱히 간섭하지 않고 아무말 없이 지나가는 게 맞다고 생각하는데... 근데 또 시끄럽게 통제가 안되거나 남한테 피해를 주는 애들도 있잖아요? 근데 그럴 땐 솔직히 어떻게 해야할지 잘 모르겠어요. 터치 안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하고 부모가 알아서 케어해주겠지 생각하니까 그냥 넘어가긴 하는데 그렇게 하는 게 맞는건지... 그리고 저도 가끔씩 뭐라 하긴해도 그럴 때마다 제 마음이 되게 불편하거든요.."라고 말했다.


아마도 교회의 시끌벅적 에너지 넘치는 꼬마 아이들과 각양 각처에서 만난 꼬마 손님들-난민 신분으로 이민을 갓 온 경우 그 자유와 방종의 경우는 상상을 초월하기도 했다-의 소란스러움으로 내면의 성가심이 점점 쌓여가고 있을 때여서 그런가. 그러니 그 때 운전을 하던 피터가 '근데 네가 만약에 그렇게 그냥 넘어간다면, 누가 그 아이들에게 옳고 그름을 알려줄 수 있겠어? 때로는 어른이 가이드가 되어서 아이들에게 옳고 그름을 알려줘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그 아이들도 무엇이 옳고 그른지 배울 수 있고 거기에 따라 스스로의 행동을 돌아보고 행동의 교정이 필요하면 고칠 수 있게 되는거지. 알려주는 사람의 역할은 반드시 필요한 거야. 거기에 대해 너무 불편해 하지 않아도 돼.'라고 답했다.


남들에겐 일말의 고민조차 하지 않을 주제이겠지만, 간섭하는 것과 간섭받는 것 자체를 워낙에 싫어하고 인상 찌푸릴 일이 있으면 남에게 피해주지 않는 선에서 오케이라고 생각하며 지나가던 나에겐 그 자체가 오랜기간동안의 꽤 큰 고민이었다. 본격적으로 교직에 입문하기 전에도 수없이 많은 학생들을 가르쳤지만 그 중에서도 유난히 버릇없고 인성교육의 부재가 절절히 느껴지는 학생들을 간혹가다 만나게 되면-다행스럽게도 딱 두 명만  머릿속에 남은 걸 보니 나머지 모든 아이들에게 고맙단 생각이 새삼스레 든다- 과연 내가 악기만 가르쳐서 될 일인지 아니면 그 너머의 것에 개입을 해야하는지 늘 고민하게 되었으므로. 사실 적극적인 개입을 하지 않았던 것은 뚜렷하게 혼을 낼 자신이 없었다는 것이 첫번째 이유이자 조금 더 강하게 혼냈을 때에 학생이 레슨을 그만둬버리면 어떡하나 걱정하는 생존의 고민이 그 부끄러운 두번째 이유이기도 했다.


그 이후로 짧았던 미국에서의 생활을 마무리하고 한국으로 돌아온 나는 '빠른 시일내로 다시 미국에 돌아가야지.. 갈 수 있겠지..'라던 생각을 힘겹게 맘 속 깊은 곳으로 고이고이 접어 욱여넣고 한국에서 임용시험을 공부하는 고시생 신세가 되었다. 그토록 거부하고 또 거부했던 선생님이라는 직업은 합격의 간절함과 공부의 막막함이 더해지니 내게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신기루가 되었고, 나는 시험 막판이 되어서는 일평생 내내 교사만 간절히 원해왔던 사람처럼 선생님이라는 직업을 간절히 그리는 인간이 되어있었다. 


깨지며 부닥친 많은 경험으로 성인을 대하는 법은 얼추 알아도-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에도 여전히 어려움을 겪으며 때로는 아니 꽤 많이 인간관계에 시달리기도 한다- 그토록 생동감 넘치는 사춘기 아이들을 대하는 법은 말 그대로 하나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학교 현장에 내던져 진 나는 사소한 하나하나에도 감탄을 연발했다. 칠판은 내 키에 딱 맞춰 높이 조절이 되질 않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칠판 지우개 털이는 나 때랑 같질 않나.. 나에겐 세상을 갓 만난 아기처럼 경이로운 곳이 학교였다. 


하지만 모든 새로운 것들이 그러하듯 새로움 이면에는 순한 아기 양같은, 물론 세상의 때가 덕지덕지 묻은 성인 양인 나를 노리던 어린 늑대들과 때로는 그 뒤를 노련하게 받쳐 주는 어른 늑대들로 가득했다. 양들도 개성이 각기 다르고 늑대 또한 개성이 각기 다른 법. 2년간 듣고 보며 경험한 것과 시달린 것들을 통해 각각의 적절한 대처법에 대해 고민하던 나는 '꼰대는 교사의 숙명인가'라는 무한하되 유한한.. 아니 다시 무한하다고 할 수 있는 당췌 답이 나오질 않는 질문에 도달하게 되었다.


함께 탐구해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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