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지박약의 평생 취미생활
중학교에 입학하고 학교에 음악 동아리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명칭은 음악 동아리지만 굳이 따지자면 보컬동아리가 맞다고 생각한다. 음악에 대한 공부를 하진 않고 그냥 열심히 노래를 부르던 동아리다. 당시 동아리에 들어가면 소위 말하는 '찍힘'을 조심하라는 말들도 들려왔고, 괜히 동아리 가입해서 학업에 지장 주지 말라는 선생님들도 계셨다.
신나는 학교생활에 이 정도의 추억은 남겨도 좋지 않을까? 청개구리 심보의 나는 음악동아리 지원서를 열심히 작성하고 대망의 오디션을 보게 되었다.
역시나 음악동아리 언니들은 무시무시한 외모를 갖고 있었다. 거의 20년 전 두발규정이 엄격하던 시절임에도 불구하고 염색은 물론이거니와 단추도 잠기지 않을 만큼 꽉 줄인 교복을 입고 있었다. 두발규정에 위반되지 않는 머리길이에 단정한 교복을 입은 나는 완전 찐따 그 자체였다. 저런 무시무시한 언니들과 같이 동아리 생활을 할 수 있을까? 걱정이 밀려왔다. 괜히 '찍힘'을 당할까 봐 눈도 못 마주치고 발끝만 쳐다보고 있었다.
동아리 지원자 중 대부분은 같은 반 친구들이었다. 한 명이 한다고 하니 너도 나도 해보자고 덤벼들었던 것이다. 물론 나도 그중 한 명이다. 막상 동아리 실에서 언니들을 마주하니 너무 무서워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이미 지원서는 작성했고, 오디션 현장에 들어왔으니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노래 한 소절은 불러야 집에 갈 수 있었다.
오디션은 2, 3학년 언니들이 동아리 실에 앉아있으면 1학년 친구들이 쭉 서서 한 명씩 노래를 부르는 걸로 진행되었다. 당시 내가 오디션 곡으로 선곡한 노래는 많은 여자들의 노래방 18번인 서영은의 내 안의 그대였다. 그리고 여전히 나의 노래방 18번이기도 하다.
오디션은 최악이었다. 많이 긴장한 탓인지 다들 목소리도 작았고 생각보다 노래를 잘 부르지 못했다. 이런 우리의 모습이 언니들에게는 꽤나 성의 없이 비친 모양이다. 이런 식이면 단 한 명도 뽑지 못한다며 제대로 하는 친구가 한 명도 없다며 화내는 모습이 어찌나 무섭던지 오금이 저려왔다.
언니들은 우리에게 10분 정도의 시간을 더 줄 테니 다시 연습을 하던지, 선곡을 바꾸던지 제대로 준비해서 다시 오디션을 보라고 했다. 강압적이고 험악한 분위기에 손이 달달 떨렸다. 가사를 외우고 있는 노래 중에 잘 부를 수 있는 노래가 뭐가 있는지 열심히 생각하고 고민하고 또 연습했다.
다시 재 오디션을 보러 입장했고 언니들은 누가 먼저 부를 건지 물어보았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나는 차라리 빨리 끝내고 맘 편히 있고 싶어서 손을 번쩍 들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때부터 약간 관종의 끼를 가지고 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다시 고른 노래는 아이비의 바본가 봐. 당시 조그마한 내 MP3 플레이어에 꼭 들어있던 노래였다. 이번에도 제대로 부르지 못하면 정말 큰 소리가 날 것 같아 최대한 집중해서 큰 목소리로 열심히 불렀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내 노래가 끝나자 언니들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진작 이렇게 부르지 그랬냐며 무려 박수를 쳐주었다. 1학년 중 나 포함 총 세명의 합격자가 있었고, 박수를 받은 사람은 내가 유일했다.
음악동아리에 합격한 1학년 세 명은 모두 같은 반이었고 우리는 당연한 수순처럼 수련회 장기자랑에서 또 학교 축제에서 무대에 올라 노래를 불렀다. 무대에 올라 노래를 부르고 박수를 받는 일은 정말 떨리면서도 설레는 일이다. 무대에 오르기 전의 긴장감과 노래를 부르는 동안 느껴지는 떨림, 그리고 노래가 끝난 뒤에 받는 박수와 칭찬. 그 과정에서 느껴지는 여러 감정들은 뭔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감동이 느껴진다. 겨우 두 번뿐인 무대 경험이지만 평생의 잊지 못할 좋은 추억을 남긴 거 같아 행복하다. 지금도 문득 그 시절을 떠올릴 때면 음악 동아리에 가입하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언제 또 무대에 올라 노래를 부르는 일이 생기겠는가.
나는 노래를 부르는 게 정말 좋다. 종종 듣는 노래 잘 부른다는 칭찬은 내 자존감을 상승시킨다. 끈기가 없어 취미도 이것저것 깔짝대는 내가 살면서 꾸준히 해온 취미생활은 단 하나 노래 부르기다. 지금도 내 차 구석에는 블루투스 마이크가 자리하고 있다. 마이크를 쥐고 그 좁은 자동차 안이 나만을 위한 무대라 생각하고 열창을 한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또 무대에 올라 노래 한 곡 부를 수 있는 날을 상상하곤 한다.
항상 슬픈 이별노래만 부르는 나를 보며 친구들은 어제 이별했냐며 장난스러운 물음을 던지곤 한다. 노래는 감정이 생명이지. 가창력에선 좀 부족할지언정 감정표현은 진짜 잘한다고 자신할 수 있다. 겨우 2회뿐이지만 보컬레슨을 받은 경험이 있다. 선생님께서도 감정선은 따로 손볼곳이 없을 만큼 완벽하다 칭찬해 주셨다. 뿌듯하다.
주말엔 꼭 코인노래방에 들러 한 시간 정도 노래를 부르곤 한다. 가끔 컨디션 좋으면 1시간 30분도 부른다. 이렇게 노래를 부르는 시간은 나에겐 큰 의미가 있다. 스트레스 해소는 물론이거니와 내가 좋아하고 잘한다 말할 수 있는 걸 뽐내는 시간. 내 자존감을 충전하고 일주일의 피곤함을 날리는 리프레쉬의 시간. 그리고 나도 뭔가 꾸준히 하고 있다는 걸 스스로 상기시키는 시간.
잘 아는 인생 선배님께선 취미생활의 중요함에 대해 항상 강조하셨다. 한두 시간 정도는 온전하게 집중할 수 있는 취미생활을 갖고 있는 것이 인생에 큰 도움이 된다고 늘 신신당부하셨다. 그런 취미를 찾는 것 또한 나를 되돌아보고 내가 뭘 좋아하고 잘하는지 찾게 되는 일이라고 하셨다. 나는 이 말에 매우 공감한다. 가끔 인생에서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 친구들의 고민상담을 할 때면 나는 새로운 취미를 찾아보라고 꼭 얘기한다. 취미생활을 통해 잠시나마 힘든 것들을 잊었으면 싶은 마음과, 새로운 도전을 통해 뭐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생기길 바라는 마음이다.
나는 앞으로도 더 많은 취미생활을 갖고 싶고 다양한 것들을 경험해 보고 싶다. 그리고 그런 다양한 경험들을 통해 내가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갖고 싶다. 지금까지 노래 부르기로 그 취미생활의 맥을 이어왔으니 앞으로도 계속 노래를 부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