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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냥이 Aug 18. 2023

26살 추주임 퇴사하다(2)

퇴사에 대한 상사의 반응

 퇴사 날짜가 정해지고 나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다. 

'시간이 안 간다' 

그렇다. 퇴사를 결정하고 디데이가 오기까지 한 달 남짓의 시간이 남아있었다. 이미 마음은 콩밭에 가 있었고, 아침마다 출근하기 싫다는 말로 하루를 시작했다. 퇴사를 앞둔 주임 나부랭이가 뭐 크게 할 일이 었었을까? 

학교와 연관된 업무를 하던 나에게 방학인 2월은 그냥 노는 달이었다. 일도 없고 꾸역꾸역 자리를 지키려니 그 또한 엄청난 곤혹이었다. 


 그렇게 하루하루 날이 흘러 드디어 퇴사날이 되었다. 

입사 때부터 퇴사하는 그날까지 잔소리 한 번 없이 항상 친절하고 상냥한 상사로 계셔주었던 차장님과 과장님께 뜻밖의 선물을 받게 되었다. 


 잠깐 삼천포로 빠져 우리 과장님 얘기를 좀 해볼까 한다. 15살의 나이차이가 무색하게 과장님과 나는 자매처럼 지냈었고, 항상 일도 잘하고 성격도 좋다며 내 칭찬을 아까지 않는 분이셨다. 사회 초년생 사원에게 과장님이란 아주 높은 곳에 계신 분이었는데 마냥 이뻐해 주심에 지금도 감사한 마음이다. 처음 면접 보러 간 날 커피포트에 팔팔 끓는 물로 녹차를 타 주시던 과장님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편하게 마셔도 된다며 웃으며 건네주셨지만 너무 뜨거워서 컵을 잡을 수도 없었다. 입사 후 한참이 지나 면접 때 얘기를 하게 되었다. 면접이 끝나고 그 녹차를 들고 나오니 그제야 따듯하게 마실 수 있을 만큼 식어있었다는 이야기. 과장님은 내가 너무 긴장해서 못 마시고 있는 줄 알았다고 하셨다. 별것도 아닌 일이지만 그땐 뭐가 그리 재밌는지 숨넘어가게 웃으며 대화를 했었다. 


 언젠가 퇴근길이었다. 과장님과 나는 항상 같이 칼퇴를 하고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앞서 가는 과장님 뒤에서 핸드폰을 보며 걷고 있던 나는 갑자기 콘크리트 바닥에 처박혔다. 사용하지 않는 주차장 문을 쇠사슬로 막아두었는데, 핸드폰을 보다가 그 사실을 까먹고 그대로 쇠사슬에 다리가 걸려 앞으로 고꾸라진 것이다. 울퉁불퉁하게 패인 콘크리트 바닥에 무릎을 그대로 찍고 넘어진 나는 소리도 못 내고 뒹굴고 있었다. 쿵! 소리에 뒤를 돌아본 과장님은 놀라 내 이름을 불렀다. 그때였다. 과장님이 아끼는 프라다 백을 바닥에 내팽개치고 나에게 달려오는 모습에 후광이 비추었다. 무릎에서 피가 철철 났지만 아픔을 느낄 새도 없이 가방을 던지고 달려오는 과장님에게 크게 감동받았다. 그 몇백짜리 가방을 바닥에 던지고 달려올 만큼 날 걱정해 주시다니! 그날 난 동네 정형외과에 가서 의사 선생님의 크게 다쳤다는 말과 함께 세 바늘정도 꿰매고 한동안 고생을 했다. 


 이 얘기를 왜 하냐고 묻는다면, 바로 포인트는 프라다! 

 퇴사 선물을 준비했다며 과장님은 예쁜 프라다 쇼핑백을 내게 건네주셨다. 아직 어린 나이에 명품 아이템은 단 하나도 없던 내게 처음으로 명품을 선물 받은 순간이었다. 쇼핑백 안에는 프라다 향수가 들어있었다. 좋아할 만 한걸 사주고 싶었는데 향수가 없는 거 같아 준비했다는 과장님께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을 받았다. 그냥 스쳐 지나가는 직원 중 한명일 텐데 이렇게 선물까지 준비해 주심에 마음이 얼마나 따듯했는지 모른다. 집에 돌아와 향수를 꺼내 들고 사진 찍고 여기저기 자랑하느라 정신이 없을 정도였다. 그 향수는 지금도 내 화장대 위에 고이 모셔져 있다. 세월이 많이 흘러 먼지도 좀 쌓이고 예전 같은 영롱함은 좀 잃었지만, 그래도 인생 첫 향수 선물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대망의 마지막 출근. 점심을 먹고 난 다음에 인사를 드리기 위해 차장님 자리로 갔다. 내가 입사를 하자마자 다른 부서로 옮기게 된 차장님과는 업무를 같이 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종종 회식 때 인사도 드렸었다. 면접관으로 처음 만났을 때부터 좋은 인상을 심어주신 차장님께도 꼭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었다. 

'안 그래도 부르려고 했는데 딱 맞춰서 왔네?'

그날도 젠틀하신 차장님께서는 타이밍을 잘 맞췄다는 말씀과 함께 자그마한 쇼핑백을 건네주셨다. 선물은 정말 생각지도 못했던 거라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그동안 열심히 일하느라 고생했다는 말과 함께 어디서든 잘하고 지낼 거라며 용기를 주셨다. 부끄럽고 민망한 마음에 싹싹하게 대답하지 못한 게 지금까지도 마음이 좋지 않다.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차장님 덕분에 입사도 하고 좋은 분들과 함께 일할 수 있어서 너무 감사했다고, 항상 건강하시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가끔씩 생각이 났지만, 새해 인사 한 번 전하지 못한 게 참으로 죄송스럽다. 

 차장님이 주신 선물에는 작은 카드도 들어있었다. 정갈한 필체로 좋은 말씀 적어주셨던 걸로 기억한다. 


 차장님이나 과장님쯤 연차가 되면 많은 직원들을 만나고 또 떠나보냈을 것이다. 그 수많은 직원 중 한 명일 뿐일 텐데 이렇게까지 챙겨주심에 지금도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다. 

 내가 그래도 사회생활을 잘했구나, 내가 잘해서 나도 좋은 분들을 만날 수 있었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회사를 다니다 보면 같이 일하는 동료와 직장 상사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두 잘 알 것이다. 좋은 사람을 만나면 그나마 다행이겠지만 정말 상극을 만나면 매일매일이 스트레스의 연속이고 결국 퇴사로 이어질 수도 있는 문제다. 항상 이상한 회사만 골랐다니며 했던 고생은 다 액땜이 아니었나 싶다. 이렇게 좋은 인연들을 만나려고 잠깐 고생을 한 모양이다. 24살에 입사하여 26살에 퇴사를 하고 지금은 31세의 나이가 되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과장님과는 종종 안부인사를 하고 자주는 아니어도 가끔 만나서 맛있는 거 먹고 대화도 나누곤 한다. 이제는 정말 편한 언니동생이 되었다. 과장님은 무슨 과장님이냐며 언니라고 부르라는 말에 가슴이 뭉클했다. 비록 회사에서 상사와 부하직원으로 만났지만 회사를 벗어나 좋은 인연으로 남을 수 있음에 감사할 따름이다.  


 라테 같은 이야기를 하고 싶진 않지만, 각종 sns와 커뮤니티에 올라오는 내용을 보더라도 요즘 회사 분위기는 예전과 많이 다르다. 그리고 나 또한  불과 7~8년 전과 지금을 비교하면 많은 것들이 달라졌다는 걸 몸소 느끼고 있다. 걱정으로 건네는 한마디는 오지랖으로 느껴지고 농담으로 던지는 말은 불쾌한 말이 되었다. 나 때는 그냥 우스개 소리로 넘어가던 말들도 이제는 함부로 할 수 없는 사회 분위기가 된 것이다. 시대는 빠르게 변하고 있고 그 속도를 잘 따라가 사회 초년생들에게 어느 정도 맞춰줘야 한다는 생각도 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 내 또래들도 내 윗 분들도 다 라테 시절이 있었다. 나 또한 사회생활의 연차가 쌓여갈 때마다 '아 그랬었지' 혹은 '아 이런 의미였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곤 한다. 세상이 많이 바뀌어 예전 같을 순 없겠지만 가끔은 너무 급변한 분위기가 안타까울 때도 있다. 팍팍한 세상이 되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예전에 비하면 모두들 너무 예민해져 있다. 조금만 여유를 가지고 편안한 마음으로 사회생활을 하면 어떨까 싶다. 긍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본다면 힘든 회사생활 속에서도 잠깐 웃으며 대화할 수 있는 좋은 인연을 만날 수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과장님과 차장님 생각을 하며 이렇게 글을 쓰자니 옛날 생각이 많이 난다. 이제는 내가 직원들에게 일을 알려주고 사회생활을 가르쳐 주는 입장이 되고 보니 뭔가 책임감 같은 게 느껴진다. 오늘은 지금의 내가 있게 한 두 분께 안부 인사를 드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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