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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iva Jun 22. 2017

운명의 굴레에서

김약국의 딸들

 운명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어퍼컷을 날리는 노련한 복서와 같다.

어퍼컷은 사람의 신체 부위 중에서도 충격 흡수율이 낮은 턱을 공략하여 엄청난 충격을 가한다.

박경리의 소설 <김약국의 딸들>을 읽으면서 운명이란 얼마나 고약하고 강력한지 생각해본다.


 김약국의 딸들은 여러 세대에 걸쳐서 한 가문이 몰락하는 과정을 그려낸다. 오랜 시간 사랑받으면서 드라마로,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옛 시절 경험에서 우러난 서러움일까, 소설은 인간의 비극이라기 보다도 여자의 비극들로 그려진다.


 가문의 비극은 김약국의 어머니 숙정의 정절을 문제로 시작된다. 숙정은 과거 혼담이 오갔던 남자가 통영으로 찾아오면서, 남편의 의심을 받고 비상을 먹고 자결한다. 이후 "비상 묵은 자, 자손은 지르지 않는다 카던데..."라는 대사가 반복적으로 나오며 가문의 비극적인 운명을 예견한다.


 그 이후 김약국의 아비는 남자를 살인하고 도망가고, 김약국은 봉제 영감 아래에서 자란다. 마음에는 어린 나이에 죽은 사촌 연순을 품은 채로 정 없는 결혼을 하여 첫아들을 돌림병으로 잃고, 다섯 명의 딸만 낳는다.

 김약국의 아내 한실 댁은 자신의 다섯 딸들을 이와 같이 묘사한다.


큰딸 용숙은 샘이 많고 만사가 칠칠하여 대갓집 맏며느리가 될 거라고 했다. 둘째 딸 용빈은 영민하고 훤칠하여 뉘 집 아들자식과 바꿀까 보냐 싶었다. 셋째 딸 용란은 옷고름 한 짝 달아 입지 못하는 말괄량이지만 달나라 항아같이 어여쁘니 으레 남들이 다 시중 들것이요, 남편 사랑을 독차지하리라 생각하였다. 넷째 딸 용옥은 딸 중에서 제일 인물이 떨어지짐나 손끝이 야물고, 말이 적고 심정이 고와서 없는 살림이라도 알뜰히 꾸며나갈 것이니 걱정 없다고 했다. 막내둥이 용혜는 어리광꾼이요, 엄마 옆이 아니면 잠을 못 잔다. 그러나 연한 배같이 상냥하고 귀염성스러워 어느 집 막내며느리가 되어 호강을 할 거라는 것이다.


 한실 댁이 딸들을 하늘 같이 생각하는 이유는 바로 성공적인 결혼생활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즉, 과거의 여성들에게 성공과 행복은 스스로 개척해나가는 것이 아니라 결혼으로 정해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의 비극 역시 결혼으로 나타난다. 용숙은 과부가 되어 영아 살해범까지 된다. 용란은 머슴 한돌이와 육체적인 관계를 계속하다 아편쟁이 남편을 만나고, 남편은 한실 댁과 한돌이을 도끼로 찍어 죽인다. 결국 용란은 미쳐버린다. 용옥은 서기두와 결혼하지만 결혼 생활 내내 사랑받지도 못하고 시아버지에게 강간을 당한 후, 서기두에게 도망가다 배가 침몰되어 사망한다. 용혜는 미친 용란을 돌보며 하루하루 괴로워한다.


  논리적으로 이해하기에 갑작스러운 전개들은 운명, 샤머니즘을 통해서 풀어진다. 이러한 비극 속에서 운명을 개척해나가는 인물은 바로 여성이다. 소설 속의 '남편'들은 아무런 해결책도 제시하지 못한다.


김약국은 어린 시절 "누부, 나 그만 타관에, 타관에 가고 싶다."라고 말하며 자신에게 얽힌 굴레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의지를 보이지만 결국 실천하지 못한다. 김약국은 그 후 평생을 수동적인 인물로 살아온다. 약국을 그만두고 통영의 어장을 경영하지만 모든 일은 서기두에게 일임하고 자신은 "어장에 관하여 아는 바 없었다." 나중에 남해환에서 사고가 났을 때의 태도를 보아도 그렇다. "김약국은 이 소동에 뜰 안으로 나와 가족들을 무마하려 했으나 그 자신이 더 기진해 있었다." 소설의 전반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대해서 모두 수동적인 태도를 보인다. 그는 가족에게도 사랑을 잘 표현하지 않았고, 자신에게 정열을 표하는 소청에게도 아무런 갈증도 느끼지 않는다.


 박경리는 '조선의 나폴리' 통영의 사람들을 진취적이며 모험심이 강하다고 표현한다. 가문의 비극에도 불구하고 진취적인 태도로 운명을 개척할 수 있다는 것을 처음부터 암시하는 대목이다. 운명, 샤머니즘이라는 비이성에 대응하는 지식인으로써 둘째딸 용빈의 역할이 두드러진다. 소설 속 인물들은 문제에 대해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거나, 한실 댁처럼 무당에 의지하기도 하고 용옥이나 용빈은 종교에 의지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결국 한실 댁이 한 굿은 아무런 효과도 없었다. 또한 용옥이 강간을 당했을 때, 용옥이 죽을 때 역시 용옥은 자신의 불행에 관해서 계속해서 기도하지만 믿음이 해결해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겨우 아이와 용옥의 시체를 떼어냈을 때 십자가 하나가 모래 위에 떨어졌다."


한실 댁이나 용옥과 달리, 용빈에게서는 소설 전반적으로 종교에 대한 태도의 변화를 관찰할 수 있다.

소설의 중반 종교에 대해 비판적인 태윤과 논쟁을 하는 과정에서 용빈은 믿음에 확신을 가진다.

"무섭더군. 그러나 네가 말하는 하나님의 힘을 빌리고 싶지는 않더군. 일찍이 그 어느 누가 죽음에서 구원을 받았느냐 말이다. 너희들의 하나님인 그리스도도 못 박혀 죽지 않았느냐 말이다."라고 말하는 태윤에게 용빈은 단호하게 "지금 현재, 나는 그분의 지배를 받고 이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연인 홍섭과 같이 믿음을 지켜가던 용빈은 홍섭의 배신에 처음으로 눈물을 보이며 깊은 절망을 느낀다. 이미 용빈은 집안에 찾아온 여러 비극들로 속으로 눈물을 삭히던 중이었다. 그 후 용빈은 케이트에게 찾아가 한참을 울다가 미움과 원망으로 가득 찬 마음으로 기도를 할 수는 없다며 케이트에게서 떠난다.

 소설의 마지막에서 케이트가 영국으로 돌아갈 때 전해준 성경을 용빈은 통영을 떠나가면서 들고 가지 않는다. "이거 용란이에게 전해주세요. 모르겠지만...."이라고 말하며 성경을 남기고 간다.


 박경리가 태윤의 소리를 빌려 "신격화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약한 인간들"이라고 표현했던 종교라는 비이성에서도 벗어나, 진정한 이성과 합리를 갖춘 지식인으로써 성장하는 대목이다. 김약국의 다섯딸 중 교육을 받은 신여성으로서 자신만의 직업을 가지며 다른 터전에서 자신만의 삶을 꾸려온 용빈이라는 인물이 마지막으로 온전하게 남은 용혜를 데리고 통영을 떠나며 통영 항구에 장막은 천천히 내려진다.


 박경리는 비이성과 유교적 관념으로 비롯된 여성의 비극을 여성이 스스로의 힘과 지성으로 해결해나가는 것을 보여준다. 살아있는 한 살아가는 법을 계속해서 배우라는 말이 있다. 사실, 김약국의 가문에는 어처구니가 없고, 맥이 빠지고, 왜 나인가 싶을 일들 뿐이다. 그러나 박경리는 말한다. 아무리 운명이 어퍼컷을 날리고 정신을 못 차리게 하더라도, 그것을 이성의 힘으로 견디라고. "사람은 누구나 다 그럴 수 있어. 안 한다뿐이지." 어쩐지 박경리 선생님의 깊은 삶의 역경들이 느껴지는 소설이다. 동시에 역경을 이겨내 왔던 박경리 선생님의 강인한 정신력도 느껴지는 소설이었다. 박경리 선생님의 딸 김영주 씨는 자신의 어머니를 이렇게 말한다.


 "인간으로 해야 할 도리라고 생각하면 어떤 역경과 고난이 닥쳐도 추호의 주저함도 없던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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