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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흔살 어른이 Nov 29. 2023

마흔, 일탈을 해도 될 나이

마! 흔한 일 아니겠니?

10년에 한 번씩, 내겐 주기적으로 일탈이 찾아온다. 

열 살의 일탈은 너무 오래전이라 기억이 나지 않는다. 

스무 살엔 대학교에 들어가 밴드부에 가입했다. 은근 소심한 성격이었던 나는 남들 앞에 서는 것을 정말 싫어했다. 그런 내가 무대에 올라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연을 하다니! 무슨 바람이 불어서일까? 먼저 밴드부에 들어가기 위해선 오디션을 봐야 했다. 우수한 성적으로 오디션에 합격하기 위해 나는 그동안 숨겨왔던 실력을 보여줬다. 하지만 보컬은 아니었다. 엄마가 피아노 학원을 하셨는데, 어릴 때부터 피아노를 배웠다. 피아노에 흥미가 떨어지자 엄마는 새로운 악기를 한번 해보자며 클라리넷 배웠다. 밴드부 오디션에서는 피아노를 쳤다. 조성모의 To Heaven을 피아노로 연주했다. 그런데 선배가 대뜸

"노래도 같이 할 수 있어요?"

라고 물었다. 보컬을 하고 싶었던 나는 노래와 함께 피아노를 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워낙 오랜만에 피아노를 쳤기 때문에 실력이 노래와 함께 할 정도는 아니었다. 게다가 피아노를 쳐본 사람은 알겠지만, 노래와 함께 피아노를 치는 건 참 어렵다. 


결국 나는 밴드부 오디션에 합격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오디션의 합격률은 100%였다. 대학교 4년 동안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을 밴드부 활동이었다. 그 덕분에 소심했던 10대의 나는 20대가 되어 남들 앞에 서는 것에 크게 거부감이 없게 됐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직장 생활을 시작한 나는 홍보대행사에서 약 5년 동안 일을 했다. 그땐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밤 11시에 퇴근해서 들어올 때면 엄마가 

"웬일로 이렇게 빨리 들어왔어?"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렇게 정신없이 지내다 서른 살이 됐다. 서른 살이 된 것을 기념해 집에서 혼자 맥주 한잔을 하며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를 들었다. 그리고 서른 살이 된 새해의 첫 출근을 했다. 화요일로 기억하는데, 서른 살의 새해 첫 출근을 하고 수요일의 뜨는 해를 사무실에서 봤다. 남들이 출근하는 수요일 아침, 나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회사 앞 사우나에서 씻고 한 시간 정도 눈을 붙인 뒤 다시 사무실로 들어와 일을 했다. 물론 그날도 빨리 가진 못했다. 목요일에 다시 출근, 그리고 금요일의 뜨는 해를 또 보고 아침에 사우나로 향했다. 사우나를 가기 전 24시간 설렁탕집에서 아침밥을 혼자 먹는데 너무 서글펐다. 그래서 아침에 소주 한 병을 시켜 설렁탕과 함께 소주 반 병을 마셨다. 그렇게 서른 살 새해의 첫 주의 금요일이 됐다. 앞으로 내 인생을 계속 이렇게 보내야 하는 건가 암울하기만 했다. 힘들기도 하고 일도 하기 싫어 4시쯤 돼서 팀장님한테 먼저 가보겠다고 자리를 나섰다. 그리고 종로로 향했다. 종로에는 유학원이 많았다. 

"나이가 서른으로 좀 늦은 감이 있긴 하지만 어학연수를 가려합니다"라고 상담사에게 말했다.

"서른도 늦지 않았어요. 그래도 지금 가는 거면 원하는 조건이 있을 텐데요?"라고 상담사가 내게 물었다.


캐나다 휘슬러 스키장이 유명한데, 그 스키장이랑 가장 가까운 도시로 잡아주세요

그리고 3개월 후 나는 캐나다 밴쿠버로 어학연수를 가장한 여행을 떠났다. 밴쿠버 공항에 도착한 그날을 아직 기억한다. 주위에선 아무도 모르는 낯선 곳에 혼자 덩그러니 놓여있으면 무섭기도 하고 외로울 거라 했지만, 나는 공항 게이트를 나오는 순간부터 입가의 미소를 멈출 수 없었다. 그리고 밴쿠버에서 지금의 일본인 아내를 만나 결혼해 행복하게 살고 있다.


마흔 살의 일탈은 서른 살의 일탈에 비하면 조금 늦게, 마흔두 살에 찾아왔다. 어느 날 카카오톡 상단의 배너 광고가 눈에 띄었다. 노란색 클래식 바이크 광고였다. 나도 모르게 광고를 클릭했고, 바이크 회사의 홈페이지에 들어가 사진들을 둘러봤다. 그리고 내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내 인생의 버킷리스트에 오토바이는 없었다. 어릴 때 경험으로 오토바이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기도 했다. 작은 아빠가 오토바이 탔는데, 내가 6~7살쯤 됐을 때, 작은 아빠 오토바이 뒷자리에 탄 적이 있다. 재밌을 줄 알았는데 막상 타고나니 너무나도 빠른 스피드에 무서워서 자지러지듯 울었다. 작은 아빠는 그 일로 할머니한테 엄청 혼이 났다. 나중에 작은 아빠가 하는 말이 오토바이를 탄 거리가 10m도 안 됐고 속력도 시속 10~15km 정도였다 한다. 


그런 내가 오토바이 광고를 보고 가슴이 뛰었다. 

"여보, 나 오토바이를 타보고 싶어. 면허 학원 다녀볼까?" 조심스레 물었다.

"하고 싶은 거 있음 해" 아내의 쿨한 답변에 용기를 얻고 2종 소형 면허 학원에 등록했다. 

우리나라는 '오토바이를 타면 죽는다'란 선입견이 있는 데 선뜻 승낙을 해준 아내에게 왜 반대를 안했냐고 물어봤다.

"남자들은 나이 먹으면 오토바이가 타고 싶나 봐. 우리 아빠도 예전에 은퇴하고 오토바이를 사셨어. 근데 조심해서 타"

강원도 철원 노동 당사에서 찍은 사진, 공사 중이라 아쉽긴 했다.

직장인이라 시간이 많지 않았던 나는 주말이면 새벽 6시에 학원에 가 하루 3시간씩 연습을 했다. 그렇게 몇 주의 주말 아침을 포기하고 필수 교육 시간을 모두 채웠다. 그리고 결전의 그날이 됐다. 합격을 하면 가는 길에 바이크 가게에 들러 예약을 할거라 마음먹었다. 그런데, 2종 소형 면허를 따는 것은 쉽지 않았다. 모든 코스를 돌지 못하고 중간에서 실격을 당했다. 


실패의 원인을 한번 분석해 봤다. 토요일이 면허 시험이었는데, 마지막 연습 주행이 금요일 밤이었다. 연습을 하고 잠을 자면서 익숙함이 없어진 것이리라. 그래서 돈을 더 내고 시험 당일 아침에 1시간 정도 연습을 하기로 했다. 재 도전의 시간! ㄱ자 구간에서 감점을 받고 겨우 통과했다. 운전 학원 선생님의 팁 중 하나는 어차피 감점을 받을 거면 과감히 발을 디뎌 감점을 받고 자세를 제대로 정비한 후 다시 출발하란 것이었다. 


합격의 기쁜 마음을 안고 카카오톡 광고에서 봤던 클래식 바이크 매장으로 향했다. 사실 바이크에 대한 관심은 카카오톡 배너 광고의 인도산 바이크였지만, 실제로 첫 바이크로 갖고 싶었던 건 일본산 H사의 바이크였다. 아내가 오토바이를 살 때 돈을 보태준 다하여 H사의 바이크를 얘기했는데,

"뭐라고? 오토바이가 그렇게 비싸? 자전거랑 비슷해서 200~300만 원 정도면 사는 줄 알았지!"

자칫 잘못하다 아내의 지원금을 못 받을 수도 있다 생각해

"아니야~ 이건 그냥 갖고 싶은 거고, 절반 정도되는 가격의 바이크도 있어~"

첫 시작이 힘들지, 우선 시작하면 업그레이드하는 건 쉬울 거란 희망과 기대를 안고 아내의 지원금을 보태 바이크를 예약했다. 


3개월을 기다리고 드디어 받은 내 생애 첫 바이크. 비록 350cc 단기통이지만 마흔 살의 일탈을 시작하기엔 부족함이 없었다. 동동동동 거리는 엔진 소리에 '동동이'란 별명도 지어줬다. 바이크를 탄지 이제 1년, 회사를 다녀야 하고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는 시간도 소중해 주로 이른 새벽 또는 밤늦게 탔다. 그래도 시간을 내서 강화도, 임진각, 철원 등 여기저기 혼자 다녀오고 있다. 주변에 바이크를 타는 지인들과 함께 탄 적도 있지만, 대부분 솔로 라이딩을 즐긴다. 가고 싶으면 가고, 힘들면 쉬고, 가다가 귀찮을 때면 돌아오기도 하고... 회사에서나 집에서나 하고 싶은 것보다 해야만 하는 것들을 하는 요즘, 이렇게 온전히 나만의 시간을 보낸 적이 얼마였던가? 


단기통 머플러에서 나오는 동동동 거리는 소리와 함께 마흔 살의 일탈을 소중히 즐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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