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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무주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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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 Dec 08. 2023

무주기행(feat.산골낭만)

낭만적인 산골 청년들

11월 초의 날씨치고는 꽤 따뜻했다. 수족냉증의 나도 반팔만 입고도 추위를 느끼지 못했다. 산골낭만의 첫 체험 프로그램은 사과밭이었다. 참가자들을 위한 체험나무인 듯, 수확을 마친 나무밭 중앙에 사과를 매단 나무 한그루가 서있었다. 나뭇가지에 작고 동그랗게 매달린 빨간 사과를 하나 똑 따서 바지에 쓱쓱 문질러 닦고는 아삭 한입 베어 물었다. 입안에 사과즙이 가득 채워졌다. ’내가 사과를 좋아했던가?‘ 영국에 있을 때는 핑크 레이디라는 품종의 사과를 매일 챙겨 먹었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 골든 딜리셔스라는 종과 레이디 윌리엄스 종을 교배한 품종인데, 핑크빛을 띄어 핑크레이디라 불린다. 돌아온 한국에서는 사과를 딱히 사 먹지 않았던 것 같은데, 아무래도 오늘부터 사과를 조금은 좋아하게 될 것만 같았다.


다음 프로그램은 유럽식 쌈 채소를 수경 재배하는 스마트팜이었다. 가지런히 정돈된 배열의 푸른 잎들과 기계가 어느 영화 속에서 본 듯, 우주의 농장을 보는 기분이 들었다. 버터헤드, 프릴아이스, 미니로메인, 카이피라라는 이름은 우주의 꽃 이름 같았다. 사람들 모두 카이피라를 뽑아 양손에 들고 나섰다. 직접 배송박스에 포장하며, 이런 농장이라면 귀농해도 좋겠다고 말했다. 한 시간 전 사과밭에서 여름내 덮어둔 비닐을 거둘 때만 해도, 고작 그 일로 힘이 들어 귀농은 못 하겠고 내겐 1평짜리 옥상텃밭이 딱 맞는다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도착한 지 사흘째 날 아침엔 숲 속에서 필라테스를 했다. 왠지 고요함 속에 새소리가 들리고, 차분한 마음으로 명상할 거라 기대했던 것은 오산이었다. 미친 듯이 불어대는 바람에 낙엽과 머리카락이 한데 어우러져 날렸고, 모닝 필라테스는 진심을 담은 근력 운동이었다. 점심 식사가 기다려지는 아침이었다.


오후엔 동네를 구석구석 돌았다. 무주산골영화제와 반딧불축제의 도시로만 알고 있었던 무주는 건축가의 손길이 곳곳에 닿아있는, 꽤 재미있는 곳이었다. 특히 릴 적부터 지역에서 살아온 운영자 중 한 분이 지나가는 길목마다 아는 사람을 만나서 신기했다. 모두가 나를 알고, 모두에게 인사를 해야 하는 삶의 공간이라… 솔직히 나는 그런 삶은 자신이 없다고 생각했다. 누구에게나 친절히 설명하고 안내하고 양해를 구해야 하는 일에 진절머리가 난 내게는 가혹한 환경이 될 것임이 분명했다. 그렇게 세 번째 밤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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