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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정애 Dec 28. 2023

아이들이 안 오면 어떤가

아직은 혼자 즐길 일이 너무 많은데

크리스마스이브다.

우리 같은 노부부에게 특별할 것도 없는 날이지만 괜히 아이들이 기다려진다.

혹시나 전화라도 올까 내심 기대를 한다.

큰 아들은 가족이 있는 미국으로 휴가를 갔으니 기대할 것도 없고, 근처에 사는 작은아들네에게 은근히 기대를 한다.

오전 내내 기다리는 전화는 오지 않는다. 내가 먼저 전화할까 망설인다. 혹시 여행이라도 떠난 건 아닌지. 자기 가족끼리 오붓이 지내고 싶은데 시어머니가 주책없이 전화한다면 나 같아도 싫을 것이다.


남편하고 맛있는 점심이나 해 먹자. 

고구마 채 썰어 물에 담가 녹말 빼고 체에 걸러 놓고.

오트밀과 견과류 갈아 놓고 계란 한 개, 소금 약간 넣어 고구마와 버무려 피자 도우를 굽는다. 

프라이팬에 전 부치듯 반죽을 펴준다음 적당이 익었을 때 뒤집어서 그 위에 모차렐라 치즈 뿌리고 사과 한 개 얇게 썰어 얹고 계핏가루 솔솔 뿌려 뚜껑 덮고 약한 불에 잠시 더 구우면 비건 피자 완성.

그다음, 혹시 아이들 오면 해주려고 준비한 퐁듀재료 담고 치즈 그릇에 촛불을 켠다.

이번엔 그래도 크리스마스인데 '뱅쇼'라도 끓여보자.

와인 한 병 콸콸 쏟아붓고 사과, 오렌지 꿀, 계피 넣고 끓인다. 정향과 팔각은 없으니 생략. 

다음에는 제대로 하는 걸로. 과일도 건조과일이 좋은데 오늘은 생과일로,


고구마 피자와 퐁듀, 따끈한 뱅쇼, 이만하면 우리 노부부에게는 만족한 크리스마스 음식!!!

거기에 감미로운 냇킹콜에 '더 크리스마스 송'을 버무려 남편과 뱅쇼잔 부딪히면 행복 만땅!!! 


남편과 둘만의 오붓한 식사를 마치고 도서관으로 향한다. 길에는 눈이 녹지 않아 조심스럽다. 발자국마다 감사함을 꾹꾹 찍으며 걷는다. 그러면 미끄러질 염려는 없다. 잠시 서서 하늘을 바라본다. 회색 구름 사이로 간간이 푸른 하늘이 보인다. 그 하늘에 내 마음을 띄워본다. 구름이 움직인다. 구름이 떨고 있다.  내 마음도 움직인다. 내 가슴도 떨고 있다. 이 기분 좋은 떨림,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되려나 보다. 


인디언 체로키족은 12월을 '다른 세상의 달' 크리크족은 '침묵하는 달'이라고 불렀다지.  

푸른 하늘 구름에 매달려있는 지금 나는 다른 세상에 와있다. 잠시 진정하고 침묵의 시간을 가져본다. 떨리는 가슴 밑바닥에 뜨거운 감사가 흐른다. 아이들이 안 오면 어떤가, 모든 것에 감사하면 그만이지. 


냇킹콜에 '더 크리스마스 송'을 흥얼거리며 다시 걷는다.

Chestnuts roasting on an open fire

Jack frost nip ping at your nose~~

아차 가사가 더 이상 생각이 안 난다. 우째 이런 일이~ 하긴 일 년에 한 번 부르는 노래니 가사를 잊을 만도 하지.

기억력 탓하지 말고, 나이탓 하지 말자. 외우고 싶으면 다시 한번 반복연습하면 되겠지.


아이들 안 오면 어떠냐, 아직은 혼자 즐길일이 너무 많은데, 그래도 이런 날은 손주들이 보고 싶은 건 사실이다.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에 쓰인 니체의 글귀를 다시 한번 음미해 본다.

'함께 침묵하는 것은 멋진 일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멋진 일은 함께 웃는 것이다.

두 사람 이상이 함께 똑같은 일을 경험하고 감동하며 

울고 웃으면서 같은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너무도 멋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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