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중일기]
오늘에서야 깨달았다.
몇 달 동안 나를 괴롭히던 무기력의
의미와 진실을.
1985년에 태어난 나.
1934년에 태어난 할머니.
우리 둘의 모습은
의외로 많이 닮아 있었다.
츤데레 같은 성격, 말투,
고집과 자존심, 두꺼운 발목까지.
어릴 때부터 나는
그런 모습이 싫었다.
“나는 저렇게 살지 말아야지.”
지금도 다르지 않다.
나는 할머니처럼 살고 싶지 않다.
할머니를 평가하려는 게 아니다.
가족을 위해 오롯이 희생하며 살아온
그 삶을 좋다 나쁘다 말하고 싶은 것도 아니다.
그저,
나는 다른 사람이기 때문에
다른 삶을 살고 싶다는 것뿐이다.
최근 들어 할머니의 치매 증상과 섬망이 급격히 심해졌다.
그런데 놀랍게도 할머니가 복용하시는 신경정신과 약과
내가 지금 먹는 약이 같다는 걸 알고 크게 충격을 받았다.
회사에서 떨어지는 인지력 때문에 타박을 받을 때면
혹시 나도 조기 치매가 온 건 아닐까,
벌써부터 말년을 예고받은 건 아닐까 하는 공포가 밀려왔다.
일찍이 부모님을 여의고
수많은 고초를 견디며 버텨온 내가 이토록 쉽게 주저앉고 있는 현실이
너무 허탈했다.
신경정신과 진료실에서 의사 선생님은 이렇게 말했다.
“선택 권한이 없어요.
삶을 선물 받았으니 일단 살아야 해요.”
...네, 알아요.
머리로는요.
근데 몸이 말을 안 들어요.
무기력의 원인은 단지 과중한 업무나 SNS 속 타인과의 비교 때문만은 아니었다.
할머니.
그 비중이 내 마음속에서 너무 컸다.
겉으로는 “걱정돼서”라고 말했지만 그건 표면일 뿐이었다.
사실은 할머니를 통해
내 미래를 미리 보고 있었던 거다.
예측할 수 없는 노후. 다시 부모 없이 늙어간다는 공포.
지켜줄 사람 없이 혼자 남겨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그럴 때마다 나는 현실 대응 능력을 잃고
무기력 속에 잠겨버리곤 했다.
그래도 다행이다.
원인을 찾았다.
할머니가 그런 모습을 보여서가 아니라
그 모습이 나에게 경고처럼 다가왔기 때문이다.
이젠 진심으로 고민하게 됐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어떤 감정과 자세로 살아야 할지.
젊다고 시간 낭비할 때가 아니다.
현재를 소중히 여기고,
미래를 차근히 준비해야 한다.
정신 건강, 육체 건강
둘 다 챙겨야 한다.
나는 지독한 구두쇠처럼 살고 싶진 않다.
다만, 살아 있는 동안 작은 일에도 감사하며
내 몸 하나 편히 뉘일 수 있는 집에서
책 읽고, 운동하고, 일하며 평온하게 살고 싶다.
어떤 이는 “고작 저걸 깨달은 거냐?”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고작이 아니다.
이건 나에게 굉장히 큰 깨달음이다.
쾌락 속에서 스스로를 잃는 많은 사람들 속에서
나는 아프게 성장해왔고
이제는 담담하게 현실을 받아들이고 있다.
성찰을 통해 앞날을 조금 덜 욕심내며 준비해 간다면
그 안에서
매일 조금씩 행복할 수 있을 거라 믿는다.
미세먼지가 자욱한 안갯속을 달리며 생각했다.
“그래, 이 정도면 오늘도 잘 살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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