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매년 어김없이 돌아오는 수능날이었다. 바야흐로 2007년도 수능을 쳤으니, 강산이 변했을 참인데도 매년 이맘때가 되면 그때 생각이 생생하다(고 생각했다.) 어제 같이 공부를 하는 (무려 서울대를 졸업한) 친구와 이야기하면서 그 친구는 엄마가 수능날 싸줬던 진미채 반찬까지 기억하던데, 나는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했던 그 기억만 났다. 참 추웠고, 참 떨려서 언어영역 듣기가 (한국말이!!) 잘 안 들리던 기억이 선하다. 다만 엄마가 고3 때 매일 저녁 도시락을 가져다줘서 담장 너머 받던 엄마의 정성과 희생은 해가 갈수록 더 또렷해진다. 엄마랑 얼마 전 통화하며 요즘 공부가 정말 힘들다 하니, 엄마가 "그때 공부한다고 유세 부릴 때가 좋았지?"라고 했다. 정말 유세였다고 할 수밖에 없을 만큼, 고등학생 때 대학생 때 나는 한 가지 내 일만 하면 되었다. 난 지금 빨래도 돌려야 하고, 애들도 챙겨야 하고, 공부도 해야 하고, 밥도 해야 하고, 남편 기분도 맞춰야 한다. 그때가 참 좋았다.
공부에만 몰두할 수 있는 환경은 차치하고, 내가 요새 느끼는 바는 수능으로 점철되는 공부법 자체가 참 시대에 뒤떨어진다는 생각을 한다. 서른 너머 늦게라도 깨달았음에 감사해야 할까. 암기 위주의 공부법 이런 뻔한 소리는 집어치우고, 요즘 느끼는 바는 수능 공부는 A-Z까지 범위가 정해져 있었고, 이걸 몇 번이고 반복하면 시험에서 공부했던 게 다 나온다는 것이다. 수학이 약하면 수학 문제집 몇 권을 더 풀고 수학 과외를 하면 해결되었다. 대학교 다닐 때마저도 난 이 과 공부를 하면 이걸 공부해야 하고, 저 과 공부를 하면 저걸 공부해야 하고, 분리해서 보는 경향이 있었다. 덴마크에 와서 비로소 경영대학원도 다녀보고, 지금 공부도 하면서 공부라는 것이 끝과 끝을 나눌 수 없는 것임을 점차 깨닫는다. (아! 바보 도 터지는 소리)
특히 요즘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링 수업을 들으면서 소프트웨어 개발 방식으로 Agile에 관해서 계속해서 배운다. 내가 살아온, 공부해온, 일해온 방식은 모두 Waterfall이었다. 미리 정해진 방식대로 맞춰서 하고, 문서화하고, 그 계획에서 벗어나면 실패로 규정한다. Agile은 훨씬 변화의 속도가 빠르고 유연하다. 처음에 수업을 시작할 때는 어련한 이론 중 하나겠거니 했는데, 프로젝트를 진행하면 할수록 예를 들어 Agile과 소프트웨어 품질이, Agile과 테스팅이 어떻게 관련되는지 등 결국 Agile의 본질을 고민하는 게 가장 중요한 배움일 것 같다.
학기가 중반에 이르니, 전혀 별개라고 생각했던 프로그래밍 수업과 엔지니어링 수업이 계속 겹친다.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링에서 다소 초반에 UML 클래스 다이어그램을 만들어보던 게 프로그래밍 수업에서 프로젝트를 할 때 꼭 필요한 것이었고, 테스팅도 한 주 차이로 두 수업에서 함께 배우면서 애매모호하다고 생각되었던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링이 조금 더 와 닿는다.
또한 정말 요 몇 주간 프로그래밍 수업에서는 다루는 내용이 너무나 방대하고 많아서 내가 공부를 한다 해도 발만 살짝살짝 담가보는 것 같은 느낌을 지우기 힘들었다. 예를 들어 하루 수업에서 웹 프로그래밍을 다루며 HTML, CSS, Javascript, HTTP를 모두 훑었고 프로젝트에서 이렇게 써야 돼. 하면서 넘어갔다. 팀 프로젝트에서 어떻게 어느 정도로 구현할지는 온전히 학생의 몫인 것이다.
딱 A-Z 규정된 범위가 있으면 그걸 반복하면 어찌 될 텐데, 이건 밑도 끝도 없으니 구글 검색에 의존하게 된다. 수많은 자료 중 내게 필요한 걸 찾아내는 능력이 요즘 시대의 사람이 공부하는 법이겠거니 하는 것도 배운다. 이번 학기에 교과서가 있긴 했지만, 두 달도 채 걸리지 않아 끝냈고, IT 과목이라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옳은 지식이 바뀌는 바뀌는 속도도 굉장하기에 추려내서 습득하고 유연 해지는 게 가장 중요한 "공부력"인 듯하다. 역시나 Agile과 일맥상통한다.
다음 학기 수업을 듣는 과목의 실라부스를 보니, 아예 교과서가 없을 것이라고 했다. DevOps과목인데 현실에 맞춰 빠르게 변화하는 우리 학교에서마저도 내년 봄에 처음 생기는 과목이다. 그만큼 DevOps의 수요와 관심이 높아지기에 자연스레 생기는 과목인 듯한데, 교과서와 논문은 없으며 프로젝트 위주로 돌아간다고 명시해놨다. 딱 누가 이걸 이렇게 해라고 알려주면 잘 알아듣는 나인데, 역시나 수많은 검색과 시도에 의존해서 공부하느라 끙끙댈 내 모습이 눈에 보인다. 덴마크에서 대학원을 두 군데 다녀보면서 느끼는 점은 대학교라는 곳조차 변화가 참 빠르고 유연하다. Agile 중 가장 대표적인 방법이 Scrum인데, Scrum이 제대로 운영되는 지역은 북유럽과 영국뿐이라고 들었다. 전반적인 사회 전체가 유연한 게 이쪽 나라인 것 같고, 이 나라 사람들이 유난히 잘하는 것 같다. 당연히 어릴 때부터 자연스레 그런 걸 익혔을 테고, 그만큼 수능형 인간인 나에게는 챌린지 한 부분이 있을 수밖에 없다.
수능을 조금 못 쳤더라도 상심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그냥 정말 인생의 한 가지 추억할 거리를 쌓았노라 하고 또 재밌는 걸 도전해봤으면 좋겠다. 본의 아니게 가방끈이 계속 길어지다 보니 서른이 지나 누가 다 하나씩 찬찬히 알려주고 다섯 개 답 중에 하나의 정답이 있는 공부는 진짜 쉬운 공부였음을 깨닫는 것처럼 그대들도 수능 밖 세상에서 더 많은 공부를 할 가능성이 없지 않다. 우리 딸들은 이곳 덴마크에서 자라니 여기 방식대로 어련히 잘 크겠지만, 또 부모로서 수많은 정보를 추려내고 골라 습득하는 agile 공부력을 키워주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우리 딸들은 나처럼 삽질 많이 하지 않고 수월하게 총총히 빛났으면 좋겠다.
* 정말 최고로 잘하는 친구들과 프로젝트 그룹이 되었다. 내가 이 친구들과 하고 싶어서 그룹을 같이 하게 된 거긴 한데 막상 너무 잘하니까 내가 어떻게 기여를 할 수 있을까 노파심이 든다. 그래도 상상 이상의 결과물이 나올 것이라 기대된다.
* 내 인생의 대부분은 학교에서 보냈음을 새삼스레 깨달았다. 그럼에도 흔한 석사 학위 하나 없지만 말이다. 학교 다닌 년수로 따지면 긴데. 학교라는 환경이 가장 나랑 맞는 걸까 결국 학교로 돌아오게 되려나 생각도 해보았다. 아마 졸업 후 회사를 다니면서 Industrial PhD(회사와 학교를 병행하는 연구직)를 알아볼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아주 나중 일이지만 멋진 생각이다.
* 친구를 도와준다고 검색을 하다가 굉장한 걸 발견했다. 덴마크 법상 학위 소지자는 동등한 레벨, 또는 하위 레벨의 학위를 다시 시작할 수 없다.(학사 소지자가 전문학사 공부 시작 못함, 석사 소지자가 석사 다시 못함 등) 그런데 이 조건에 예외가 있었다. positive list가 있어서 노동 시장의 특별한 수요가 있을 경우 (졸업생의 실업률이 5% 이하) 동등 또는 하위 레벨의 공부를 다시 지원할 수 있다는 규정이 있던데 거기에 "소프트웨어 개발"이 있었다.
* 이번 주에 딜로이트 행사에 참여했다가, 영 이런 일류 컨설팅펌은 내가 갈 곳이 아님을 깨닫고 돌아왔다. 삼성맨의 느낌을 딜로이트에서 느꼈다.
* 학교에서 여성 개발자 졸업생 & 재학생 네트워크 모임에 다녀왔다. 액센츄어에서 일하는 2년 전에 졸업한 졸업생 하나가 아이디어를 내서 이런 네트워크를 계속 운영해나갈 듯하다. 졸업생 중 한 사람이 세 아이가 있는데 학교를 시작해 졸업했고 지금은 은행에서 서비스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다 했다. 나도 용기를 얻었다. 엄마란 공통점에 의미를 찾기도 했지만 이 사람이 말한 부분 중에, Women in tech라는 말과 Technical Women을 구별하던 게 인상 깊었다. 나도 요새 마찬가지로 이 부분을 끊임없이 묻고 있으니 말이다. 코드를 직접 짜는 Technical Women이 아니더라도 테크에 일하는 모든 사람을 포용하는 Women in tech에 본인이 해당한다고 했다. 물론 나는 Technical Women을 지향하고 있지만, 하드코어한 프로그래머가 아니더라도 다양한 가능성이 있음을 다시 각인했다. 이런 기회를 늦게나마 하나하나씩 찾아가고 알아가는 게 정말 감사하다.
* 또 어제 이 모임을 주최한 사람이 불과 2년 전에 내가 지금 다니는 과를 졸업했는데 그때 세부전공을 스스로 만들었다고 했다. 그당시에 데이터와 비즈니스를 잇는 세부전공이 없어서 스스로 이런 전공을 만들었다 이야기하더라. 우리 과에 지금은 떡하니 Business Analytics가 있다. 남편과 친구가 이 이야기를 듣더니, 몇 년 후에 네가 만든 세부전공(Cloud data engineering) 역시 세부전공 중 하나가 될지도 모를 일이라고 했다. 과연 그럴까? 정말 빠르게 학교도 학생과 회사의 수요에 맞춰서 바뀌고 있구나 깨달았다. 학생들의 프로그래밍 강의평가가 좋지 않아서 불과 2년전에 그 교수를 자르고 다른 교수로 과목 담당을 바꿨다는 것도 어제 그자리에서 들었다. 강의 평가가 허울이 아니라니!
* 스토킹 아닌 구글링을 하다가 그 새로 과목을 맡은 프로그래밍 교수님(내 대학교 인생 중 최고의 선생님이다!!)이 예전 살던 집 바로 윗집 이웃임을 알았다. 그러고보니 초인종 누를 때 그 이름을 봤던 기억이 어렴풋하게 나고 윗집 남자와 계단에서 마주치면 '하이' 인사했던 게 기억난다. 이름만 치면 전화번호와 집주소가 다 나오는 덴마크가 조금 무서워지기도 했다.
내 무궁무진한 삽질에도 길이 트이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