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남긴 항로 위 나는 여전히 날고 있다...
나의 첫 번째 해는 1996년이었다.
그 이전에도 분명 시간은 흘렀고, 나는 존재했으며, 가족은 이사를 다녔다고 한다. 그러나 기억이 없는 시간은 내 것이 아니다. 1996년, 그해 비로소 나는 '나'로서 세상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첫 번째 해의 풍경 속에는 언제나 비행기를 타는 아버지가 있었다.
검사였던 아버지는 2~3년마다 임지를 옮기며 지방 생활을 하셨다. 가족은 서울 송파구에 뿌리를 내렸고, 아버지만 홀로 떠도셨다. 금요일 밤이나 토요일 오전, 비행기를 타고 서울로 돌아오시던 아버지. 월요일 새벽, 숙취에 절어 비틀거리면서도 다시 비행기를 타고 근무지로 향하시던 아버지. 어떤 날은 어머니가 그런 아버지를 태우고 김포공항으로 달렸고, 나는 뒷좌석에 앉아 새벽의 도시를 구경했다. 그것이 아마 내 첫 번째 공항 경험이었을 것이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김포공항, 형광등 불빛 아래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 그리고 우리 곁을 떠나가는 아버지의 뒷모습.
공항은 내게 설렘의 공간이자 이별의 공간이었다.
그 시절 마일리지는 지금과 달랐다. 신용카드와 연동되지도 않았던 것 같고, 무엇보다 한번 쌓인 마일리지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았다. 평생 가는 것이었다.
지금은 어떤가.
일정 기간이 지나면 마일리지는 소멸된다. 추억처럼, 사랑처럼, 사람처럼 사라진다. 그러나 아버지가 쌓아두신 그 마일리지만은 아직 내 계좌에 남아 있다.
수십만 마일. 나는 그것을 '상속'받았다.
해외여행을 갈 때 좌석을 업그레이드할 수도 있고, 마일리지 항공권을 발권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아마 평생 그것을 쓰지 못할 것이다. 쓸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쓰지 못하는 것이다. 그 마일리지는 아버지가 매주 하늘을 날며 쌓아올린 것이다. 가족을 떠나 홀로 지방에서 근무하시며, 주말마다 집으로 돌아오기 위해 타신 비행기들. 그 피로와 그리움과 책임감이 숫자로 환산되어 남은 것이다. 어떻게 그것을 좌석 업그레이드 따위로 소비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마일리지가 아니다.
아버지가 하늘에 남긴 발자국이다.
소멸되지 않는 유산이다.
내일 오전, 나는 김포공항에서 김해공항으로 가는 비행기를 탄다.
부산에 재판이 있다.
촌스럽고 여전히 애같은 마음이지만, 고백하건대 나는 아직도 공항에 가면 설렌다. 여행이든 출장이든, 비행기를 탄다는 것 자체가 일상을 벗어나는 의식처럼 느껴진다.
인천공항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김포공항에도 저마다의 사연을 품은 사람들이 북적인다. 여행의 설렘을 안고 출발하는 사람, 바쁜 비즈니스로 종종걸음 치는 사람, 긴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여독과 아쉬움이 뒤섞인 얼굴을 한 사람.
우리는 서로 대화하지 않는다. 이름도 모르고, 어디서 왔는지도 모른다. 그저 한순간 같은 공간에 머물렀다가 흩어질 뿐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순간이 역사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과 같은 시간, 같은 공간을 통과한다는 것. 그것이 어떤 연대감처럼 가슴에 스며든다. 너무 어린아이 같은 감상일까. 그러나 공항은 내게 그런 곳이다.
수많은 출발과 도착이 교차하는 작은 우주.
내일 재판은 돈이 되는 사건이 아니다. 대학 시절 가장 친했던 후배, 룸메이트였고 이제는 친구가 된 녀석의 일이다. 자세한 사연은 밝힐 수 없지만, 안타까운 이야기를 듣고 발 벗고 나섰다. 물론 무료는 아니다. 최소한의 진행비는 받았다.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이 일을 맡은 것은 돈 때문이 아니다. 사람 때문이다. 인연 때문이다.
비행기를 탈 생각을 하니 이런저런 생각에 잠이 오지 않는다. 아버지도 부산에 근무하실 때 매주 이 노선을 타셨으리라. 김포에서 김해로, 김해에서 김포로. 같은 하늘을, 같은 구름을 보셨으리라.
비행기를 타고 가며 혹시 아버지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을까.
어리석은 기대인 줄 안다. 하늘에 발자국이 남을 리 없고, 구름에 얼굴이 새겨질 리 없다. 그러나 나는 기대한다. 이륙하자마자 눈을 감아야겠다. 조금이라도 하늘에 가까워지면, 꿈에서라도 아버지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늘나라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가면, 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지 않을까.
참, 아버지가 그리운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