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야. 나 J다.

나의 두 번째 기업 고객.

by M변

2023년 5월 24일.


컴퓨터 화면에 메일 한 통이 도착했다는 알림음이 울렸다. 그것은 단순한 전자신호였지만, 그 속에는 15년이라는 시간의 무게가 담겨 있었다.


"법률자문 관련 (K고등학교 동문 J)"


제목을 읽는 순간, 기억이라는 것의 불완전성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J. 그 이름은 희미한 수채화처럼 내 기억의 저편에서 어렴풋이 윤곽만을 드러낼 뿐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것이 벌써 15년 전의 일이라니. 시간은 참으로 무심한 조각가처럼 우리의 관계를 희미하게 깎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J는 학창시절 내 삶의 중심부에 있던 인물도 아니었다.


메일을 열었다. 존댓말과 반말이 묘하게 교차하는 그의 문장들을 읽으며, 나는 관계의 거리감이라는 것이 언어에서 어떻게 표현되는지를 새삼 깨달았다. 우리는 서로에게 선배도 후배도, 친구도 지인도 아닌, 그 어딘가의 애매한 좌표 위에 서 있었다.


2023년 해가 바뀌면서 나는 소속 로펌에서 파트너로 승진했다. 파트너. 그것은 단순한 직급이 아니었다. 변호사라는 직업의 생태계에서 또 다른 종으로의 진화를 의미했다. 나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고, 주변의 도움으로 매달 몇 건의 사건을 수임했다. 성과는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나쁘지 않은' 수준이었고, 어디 내세울 만한 찬란함은 아니었다. 나는 여전히 '로펌 파트너'라는 낯선 옷에 팔다리를 맞춰가는 중이었다.


그런 와중에 J로부터 온 메일. 그것도 '법률 정기 자문 계약'이라니!


들뜬 마음은 이성보다 빠르다. 나는 곧바로 구글이라는 현대 문명의 기억 창를 열었다. J, 그리고 그가 운영한다는 스타트업 M사.


화면에 펼쳐진 정보는 내 예상을 압도했다. 2018년 설립. 현대차, 네이버 같은 대기업을 고객사로. 국내 주요 대학교와 연구소들과의 교류. 2022년 대규모 시리즈 B 투자 유치. 직원 100명 이상.


그런데 이상했다. 아무리 사진을 들여다봐도, 내가 알던 그 J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사진 속 인물은 낯설었다.

"동명이인일 거야."


나는 스스로에게 속삭였다.

"같은 고등학교 출신 중에 J라는 이름을 가진, 이렇게 성공한 다른 사업가가 있을 거야."


그것은 J의 능력을 폄하하려는 의도가 아니었다. 진실로. 다만 우리 나이에 이 정도 규모의 기업을 일궈낸다는 것은, 마치 한여름 밤의 꿈처럼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게다가 사진 속 J는 내 기억 속 그의 모습보다 30kg은 더 묵직해 보였다.

시간은 사람을 이렇게도 변화시키는구나.




"안녕하세요. 선배님. 연락주신 L로펌의 M 변호사라고 합니다. 이렇게 연락을 다 주시고 너무 감사드립니다."

나는 메일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목소리에는 예의와 기대가 적절히 배합되어 있었다.


"K야. 나 J다. 임마."

침묵.

"기억 안 나나!"


그 순간, 사투리라는 것의 마력을 실감했다. K고등학교는 대구광역시에 위치한 명문이었다. 오랜만에 듣는 그 친숙한 고향의 억양은, 마치 시간의 문을 여는 주문과도 같았다. 기억의 파편들이 순식간에 재조립되기 시작했다.


"니 J가!? 미쳤네! 와 진짜 오랜만이다."


2011년. 우리가 청춘이라는 이름의 대학생이던 시절, 고등학교 졸업 후 처음으로 J를 마주쳤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것은 계획된 만남이 아니었다. 우리는 그럴 만큼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으니까.


명절이었는지, 다른 어떤 이유였는지. 동네의 어느 술집에 고향 친구들이 모여 있었고, 우연히 그 자리에서 J와 나는 잠시 마주 앉았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정확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진로와 전공에 대해, 인생의 방향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했던 그 시절의 무게만이 어렴풋이 남아있을 뿐이다.


"이럴게 아니라 지금 시간 되나. 만나서 이야기 하자."


J는 놀라울 만큼 변해있었다. 진취적이고 호탕한 CEO. 옛 이야기라는 서론은 짧았다. 그는 본론으로 향하는 길을 알고 있었다. 마침 퇴근 시간이었고, 저녁 약속도 없었다.


우리는 J의 회사 근처, 한우 고깃집에서 그렇게 만났다.

고기가 익어가는 불판 위에서, 15년이라는 시간이 천천히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J가 물었다. 소맥은 어떠냐고.


"좋지요."


그것은 영업용 대답이 아니었다. 진심이었다. 세상의 모든 술 중에서 하나를 택하라면, 나는 주저 없이 소맥을 선택할 것이다. 맥주의 청량함과 소주의 독한 정직함이 만나는 그 경계. 그것은 단순한 혼합주가 아니라, 서로 다른 두 세계가 하나의 잔 속에서 화해하는 순간이었다.


소기 한 점에 소맥 한 잔. 옛날 이야기 하나에 또 소맥 한 잔. 우리는 연거푸 잔을 비웠다. 알코올이 혈관을 타고 흐르면서, 15년의 거리감도 함께 흐려져갔다.


"우리 회사에 S라는 이사가 있는데 말야..."


J는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본론으로 향했다.


이야기를 정리하면 이랬다. M사에는 총무, 인사, 법무를 담당하는 S 이사라는 인물이 있다. 그가 골치거리다. 그 자리에서 곧바로 자세한 이유를 말해주지 않았지만, 결론은 선명했다. S 이사를 회사 밖으로 내보내야 한다는 것. 그런데 현재 M사의 자문 로펌이 바로 S 이사가 연결해준 곳이고, S 이사는 M사의 주식도 상당량 보유하고 있다. 매끄러운 이별은 불가능해 보였다.


"지금 로펌은 어디 쓰고 있는데?"

"XXX"


순간 숨이 멎었다. 국내 5대 로펌 중 하나. 규모로 보나 전문성으로 보나, 지금 내가 몸담고 있는 로펌과는 비교 자체가 무의미한 곳이었다. 게다가 월 자문료도 상당히 저렴하게 책정되어 있다고 했다. 당혹스러움이 밀려왔다. 내가 해야 할 일은 명확했다. M사의 기존 자문 로펌을 밀어내고, S 이사를 회사에서 쫓아내며, 그가 쥐고 있는 주식까지 회수해야 한다는 것. 그것은 마치 거인을 상대로 싸우라는 주문과도 같았다.


"해보지 뭐..."


나는 말했다. 그리고 한 가지를 덧붙였다.


"그런데, 기존 자문 로펌보다 월 자문료는 더 받아야겠습니다."


J의 표정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놀라움이었을까. 누가 봐도 내가 속한 로펌은 더 작았고, 나 역시 이제 막 파트너가 된, 여전히 주니어급에 속하는 변호사에 불과했으니까.


"그렇게 합시다."


J는 이유를 묻지 않았다. 얼마냐고도 묻지 않았다. 그저 알겠다고 했다.


그리고 우리는 계속해서 반말과 존댓말을 섞어 썼다. 묘한 존중. 묘한 배려. 그것은 관계의 이중성을 인정하는 언어 예술이었다. 일과 관련된 내용이 오가면, 우리는 대표와 변호사가 되었다. 하지만 시시껄렁한 옛날 이야기나 여자 이야기, 농담이 터져 나올 때는 다시 고등학생으로 돌아갔다. 격 없는 말투로. 우리는 두 개의 시간대를 넘나들고 있었다.


이날 자리가 어떻게 끝났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술을 많이 마셨기 때문이기도 하고, 벌써 몇 년이 흘러버린 일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기억이라는 것은 참으로 선택적이어서, 중요한 것만 남기고 나머지는 안개 속으로 사라지게 한다.


어쨌든 다음날, 나는 계약서를 작성했다.

J는 그렇게 내 두 번째 기업 고객이 되었다.

그리고 지금도, J는 나에게 가장 큰 고객 중 하나로 남아있다.


어쩌면 그날 밤, 소맥 잔을 기울이며 우리가 나눈 것은 단순한 비즈니스 계약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15년이라는 시간을 가로질러, 서로의 성장을 인정하고 신뢰하기로 한 어떤 약속이었다. 고기 굽는 냄새와 소맥의 쌉싸름함 속에서 맺어진, 보이지 않는 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