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를 배워야만 하나요?
나는 한국에서 한국인 부모 밑에서 나고 자랐다. 따라서 모어이자 모국어인 한국어가 제 1언어이다.
이런 나에게 언어적 갈증이 있어서인지 아니면 단지 외국어를 배우는 것을 좋아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부모의 국적이 다르거나 다른 나라에서 살고 있어서 두 개 이상의 언어를 습득할 수 있는 상황을 그저 부러워만 했다. 두 언어와 문화를 모두 자연스럽게 가질 수 있다고만 생각했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라고 하지만 당사자에게는 '어쩔 수 없이'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은 해 본적도 없다.
다음은 내가 부러워했던 부분이 스트레스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계기 세 조각.
1. 한국인이지만 한국어는 못합니다
지난달에 일본 여행을 갔었는데 국제 파티 비슷한 모임에 참석할 기회가 있었다.
마침 한국어를 배우고 있는 사람들이 두 명이나 있어서 내가 한국인이란 게 알려지고 우리 테이블에서는 영어와 일본어와 한국어로 이야기 꽃을 피우게 되었다. 뒤늦게 들어온 사람이 있었는데 주변 사람들이 그 사람도 한국인이라고 말해주길래 반가운 마음에 안녕하세요,라고 하는 순간 그가 손사래치며 일본어로 말했다. 한국어는 전혀 못한다고, 여기엔 영어회화를 연습하러 온거라고. (순간, 왠지 모르게 조금 섭섭한 마음이 들었지만 친절하게 주변 맛집을 많이 알려주셔서 마음이 풀렸다)
부모님은 한국분들이지만 일본에 오신지 오래 되었고 본인은 일본에서 태어났는데 한국 음식은 좋아하지만 한국어는 배울 생각이 없다고 했다. 일본에 살고 있고 파트너의 언어도 영어라 하니 한국어는 정말 필요 없는 것 같았다. 자신이 한국인이라고는 생각하지만 한국에는 별로 가고 싶지 않다고 했다. 한국에 가면 한국인의 얼굴을 가졌지만 한국어를 못하는 자신에게 자꾸 자연스럽게 한국어로 말을 거는 게 불편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2. 일본인이지만 일본어는 몰라요
한국어-일본어 양방향 모두 통번역을 하는 일본인 지인이 있는데, 자원봉사로 간혹 초등학교에서 학습 도우미 같은 일을 한다. 일본에 막 도착한 한국인 학생의 수업에 같이 들어가서 수업 내용을 통역해 주는 거다. 아이들의 신변에 관한 이야기는 (당연히)절대로 하지 않지만 가끔 특별한 경우가 있으면 함께 생각해 보곤 하는데, 한 아이의 엄마는 일본 사람인데 아이가 한국에서 자라서 일본어를 하나도 모른다고 해서 우린 이것이 정말 특이한 상황이라고 생각했다. 대부분 자연스럽게 엄마의 언어를 모어로 배우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럴수도 있나 싶었던 것이, 생각해보니 그럴 수가 있다.
일본인 엄마가 한국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면 아이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있었던 것이다.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한국어로 소통했다면 아이는 굳이 일본어를 배울 필요가 없었던거다.
그러고보니 예전 회사의 미국인 동료도 한국에 와서 처음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녀의 어머니가 한국인인데 미국에서 태어나고 미국에서 쭉 자라서 한국어를 하나도 못한다고 했다.
아버지는 미국인이고 집에서는 영어로 소통을 했었다고.
3. 한국어를 배워야만 하나요?
온라인 수업 시간에 카메라도 안켜고 제대로 대답도 안하던 어린 학생이 있었다. 한국어를 열심히 배우고 싶은 마음도 없어보였는데 왜 등록했을까 의아했다.
한국인 성을 가지고 있는 걸 보니 아버지 쪽은 한국인일테고 어머니가 한국인이 아니더라도
부모님 중 한 분이 한국인이라면 듣기는 어느정도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한국어로 대화를 시도했지만 아이는 생각보다 한국어를 잘 못했다. 이 학생은 집에서도 한국어를 아예 안쓰나보다 생각하긴 했다.
나중에 학생의 어머니와 친해져서 학생과 다같이 만난 적이 있었는데
어머니께서 아이에게 어머님의 모국어로 이야기를 하시니까, 아이가 엄마에게 영어나 한국어로 말하라고 했다. 어린 학생의 속깊은 배려에 깜짝 놀랐다. 그 나라 말을 못하는 내가 언어에서 소외될까봐 그렇게 말한 거였다.
알고보니 그 학생의 주요 사용 언어는 영어였다.
그 나라 언어도 어느정도 할 수 있지만 부모님 모두 한국어와 영어를 잘하시고 학교에서는 영어로 교육 받고 친구들과도 영어로 대화하니 아이에게는 영어가 제일 편했던 거다.
부모님 중 한 분이 한국사람이라 이름이 한국식일 뿐,
한국에서는 살아본 적도 없고 한국어는 못하고 한국에 별로 관심도 없는데
주변에서는 이름만 듣고는 한국어를 잘한다고 기대했다가 멋대로 실망하니 그동안 고충이 많았던 거다.
(어머니께서는 아이가 아빠 나라말에 관심이 없다는 것을 줄곧 걱정하셨었는데
최근에 들은 소식으로는
요즘 한국어를 잘하는 게 그 나라 아이들 사이에 인기라서 아이가 한국어를 배울 결심을 했다고 한다!)
그동안 막연히 질투했던 것 같다.
교포들은 노력 없이도 두 언어를 모두 배울 수 있는 환경이 주어졌고, 부모님의 언어는 안 배우고 현지 언어만을 배운 건 그들의 어리석은 선택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두 언어를 거저 배울 수 있는 상황에서 한 가지 언어만을 배운 건 너무 아깝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게 절대로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