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 안탈리아 우리 집.
우리의 신혼집은 작은 원룸이었다.
아담한 냉장고 하나와 싱크대 하나, 딱 그만큼의 공간이 전부인 주방이 있었고
이부자리를 꺼내 바닥에 깔면 빈틈없이 딱 들어맞는 좁은 방이 하나 있었다.
찜통이 따로 없었던 몇 번의 여름을 선풍기 한 대로 버텼고,
칼바람이 불던 몇 번의 겨울을 전기장판 하나로 버텼다.
밖에 있는 보일러실을 꽉 채운 중고 세탁기가 얼어버릴 때마다 손빨래를 해야 했던 그 집에서, 우리는 살을 부대끼며 3년간 신혼생활을 했다.
그러던 2014년 9월 9일.
커다란 배낭을 앞뒤로 메고, 편도항공권을 손에 덜렁 든 채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모아두었던 돈과 퇴직금, 월세 보증금 약간이 전부라 결코 넉넉한 경비는 아니었지만,
뭐. 아껴 쓰면 되겠지. 하는 마음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세계여행을 시작했다.
이제부터는 모든 곳이 내 집이겠구나. 어디든 우리의 집이 될 수 있겠구나.
매일 아침, 창밖으로 다른 풍경을 만나는 황홀한 날들이 이어졌다.
느긋한 여행이었다.
방콕에서 한 달, 치앙마이에서 한 달, 우다이푸르에서 한 달,
여행을 하다 마음에 드는 곳이 생기면 여행하듯, 살듯, 그렇게 지냈다.
그리고 여전히 꿈만 같은, 어쩌면 정말 꿈을 꾸었던 게 아닐까 싶은. 터키 안탈리아의 우리 집.
안탈리아는 365일 중 300일이 화창해 유럽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휴양지라고 했다.
겨울에도 15도를 웃도는 따뜻한 날씨 덕에 일 년 내내 꽃이 피어있고, 가로수에는 탐스러운 오렌지가 주렁주렁 달려있는... 한마디로, 사랑스러운 도시였다.
그런 곳에서, 그것도 지중해가 내려다보이는 집에서, 일 년을 살았다.
어땠느냐면, 그러니까. 화장실이... 우리가 살던 신혼집보다 컸다.
게다가 베란다에 서면 발아래로 끝없이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2천 년이 넘었다는 항구도 보이고, 올드타운의 성벽도 보이고, 저 멀리 그림같이 서 있는 산도 보였다.
파도 소리를 들으며 차이를 홀짝일 때마다, 이 순간만큼은 우리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앞집 할머니는 먹을거리가 생길 때마다 다정하게 내 이름을 부르며 문을 두드리셨고,
그곳에서 마음을 나눈 터키 친구들은 우리를 가족처럼 대해주었으며,
자주 가는 슈퍼와 자주 가는 식당과 자주 가는 공원이 생겼다.
매주 금요일마다 열리는 시장에서는 천 원으로 오렌지 30개를 살 수 있었고,
만 원만 가지고 가도 장바구니가 넘쳐 부자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평범하지만 특별한 날들이었다. 어쩌면 평생, 다시없을 날들이었다.
꿈만 같았던 일 년이 지났다.
그리고 우리가 살던 집엔, 가족 같은 터키 친구들이 이사를 왔다.
참 다행이다.
언제고 그 풍경이 그리울 때 다시 찾을 수 있겠구나.
기꺼이 방 하나 내어줄 친구들이 살고 있는 집이니까.
이렇듯 안탈리아가 두 번째 고향처럼 느껴지는 것은
어쩌면, 우리가 쓸고 닦고 가꾸어 온기를 품은 집이 여전히 그곳에 있고
마음을 내어준 사람들이 그 집에 살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2년 반의 세계여행, 그리고 지금 우리는 제주에 있다.
해가 지고 나면 칠흑같이 캄캄해져 손전등 없이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시골마을,
침대에 누우면 천장에 나 있는 창문 너머로 하늘이 보이는 집에 산다.
알람 대신 새소리에 잠이 깨고, 바람이 불 때면 갈대들이 춤을 추며 사각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집이다.
이 집에서의 한 달이 지나면, 또 다른 집에서의 날들이 시작되고, 그 집에서의 날들이 지나면, 또 새로운 집에서의 날들이 시작될 것이다.
짧게는 하루 이틀, 길게는 한 달에서 일 년까지.
여행자의 집은 끊임없이 바뀌지만,
그곳이 아무리 낯선 땅이라 하더라도 '집'이라는 공간이 주는 어떤 위로가 있다.
따뜻한 공기가 머무는 집을 찾는 여행을 하고 있다.
우리가 스쳤던 수많은 집에서 만난 이들과,
그곳에서 만들어진 추억들의 힘으로 오늘도 여행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