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시와 음악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슬 Sep 22. 2024

첼로를 위한 에릭 사티의 짐노페디 No.1


언제 더운 바람이 불었었나 싶게, 어제는 시원한 바람이 몸을 새롭게 일깨워 준 날이었다. 

아이를 약속 장소에 데려다주고 음료를 시켜주고 서둘러 자리를 나섰다. 비가 와서 몸을 많이 움직이지 못한 답답함을 어서 풀고 싶었기 때문이다. 

비 온 뒤 숲 속을 좋아한다. 그래서 어제는 러닝을 하지 않고 숲길을 걸었다. 빗물이 땅을 적시고 빗물을 충분히 먹고 나면, 흙은 나무의 뿌리를 적시고 한숨을 충분히 돌려 땅에서부터 본연의 숲 향기가 뿜어져 나온다. 바로 그 향기가 너무 좋다. 



다행히 바람이 시원하고 햇빛도 강하지 않아 걷기에 좋았다. 이제 진짜 가을이 오려나보다. 

벌써 올해도 9월 22일. 이러다가 곧 2025년을 맞이하는 종이 울릴 것만 같았다. 무엇이라도 더 새겨 넣어 성취하고 싶은 마음은 앞서 있지만, 모든 것이 맘 같지 않게 더디게만 가고 있다. 일상을 기우듯이 겨우겨우 이어 붙이는 데에 모든 에너지를 다 쓰고 소진하기를 반복하는 것은 나를 견디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더 빼놓지 않고 산책하고 뛰고 라이딩하면서 몸을 다지려고 노력하고 있다.  


평소에 오르막길을 한창 올라가면 숨이 차오르는데, 어제는 그렇지 않았다. 

요 며칠 컨디션이 안 좋아 많이 움직이지 않아서 에너지가 비축되기도 했을 것이고, 날이 선선해져서 걷기 수월했던 것도 있을 것이고, 러닝이 익숙해져서 몸이 조금씩 적응한 걸 수도 있겠다.  아마 모두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두 시간을 걷고 걸었는데도 몸이 거뜬해서 막판엔 오르막길을 뛰어 올라가 보기도 했다. 






https://youtu.be/kuuuOUlDLEA?si=BrIavU2pJfJfop0C

로미 코펠만 ⓒ애플뮤직 아티스트 프로필

Erik Satie - Gymnopédie No.1 

Arr. for Cello & performed by Romi Kopelman




어제 산책하며 제일 많이 들었던 곡이다. 

첼로를 위한 편곡의 사티의 짐노페디.  이스라엘의 첼리스트 로미 코펠만이 편곡하고 연주에 참여했다. 


선율을 받쳐주는 느린 왈츠의 한 박자 두 박자의 리듬에서 첼로가 가을을 쓰윽 쓰윽 듬뿍 쓸어다가 내게 폭삭 안겨주는 기분이 들었다. 갑작스럽게 변한 온도만큼이나 듣는 곡들도 갑자기 변해버린 날이었다. 바람이 가을옷을 입고선 시원하고 청명한 바람 끝으로 더위에 지쳤던 마음의 모서리를 툭툭 건드려주었다. 천천히 걷는 짐노페디의 리듬에 첼로의 비브라토가 더 진하게 진동하며 가을의 온도가 툭 하니 밀려왔다. 


에릭 사티는 친구이자 예술적 동료였던 시인 라투르(Patrice Contamine de Latour)의 시  「오래된 것들 (Les Antiques)」에서 영감을 받아 이 곡을 작곡했다고 한다. 



Sois sûr que tu n'as pas d'autre

Plainte que le désir des bras

De Polymnie, aux seins de marbre,

Des guirlandes et des combats.


너에게는 분명 

폴리힘니아의 대리석 같은 가슴,

화환과 싸움을 갈망하는 마음 외에는

다른 불만은 없으리라.


Sous les ifs qui sont les temples

De la haute et sombre Vénus,

Gymnopédies et puérils

Éphèbes en l'or des héliades.


고귀하고 어두운 비너스의 신전인 주목나무 아래서,

짐노페디와 어린 에페보스들이

헬리아데스의 황금빛 속에서 춤추네.



종교적 신비주의와 고대 그리스 신화는 사티의 삶과 음악에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중요한 요소이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짐노페디는 고대 그리스 축제에서 나체의 어린 소년들이 춤추던 무도 의식에서 나온 말이다. 이 의식은 아폴론 신을 찬미하기 위해 몇 날 며칠 동안 춤추고 노래하고 시를 낭송하는 축제 의식이었다.

- 김석란, 「에릭 사티」 


출처 - 시이나 료스케, 「에릭사티, 이것은 음악이 아니다」 208p




음악의 신인 아폴론을 찬미하며 춤추고 노래하고 시를 낭송하는 축제 의식을 표현하는 시를 읽고 에릭사티는 짐노페디를 작곡했다. 느린 왈츠의 리듬은 축제 의식 속에서도 슬로우 모션이 느리게 흐르는 추상적인 춤사위처럼 명상적이면서도 신비스러운 고요한 이미지를 보여주는 것 같다. 휩쓸리지 않고 근원에 닿기 위해 몰입했기 때문에 고독하면서도 명상적인 내면의 풍경을 만들 수 있던 것이 아닐까. 



늘 익숙하게 듣던 피아노가 아닌 첼로를 위한 편곡의 짐노페디가 올 가을의 입구로 첫걸음을 안내하며 마중해 주었다. 이 곡을 들으시는 분들에게도 이 가을의 풍성함으로 이끌어 주는 감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