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시와 음악

숲이 건네준 음악 - 랭보, <새벽>

새벽 숲길을 걸으며 들었던 음악

by 윤슬



우리는 평소에 늘 무언가를 보고 듣느라 바쁘다. 어딘가를 이동할 때도 한 손엔 스마트폰을 든 채 정신없이 무언가에 빠져있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무언가를 보지 않고, 내 한걸음 한걸음에 집중해 그 빈 시공간을 오롯이 보내는 순간은 점점 사라지는 것 같다. 오랜만에 새벽 산책을 하면서 잠시 잊고 있던 여유를 자연 속에서 되돌아봤다. 자연이 주는 소리에 귀 기울였던 시간을 음악과 함께 기록해 본다.






지난 현충일, 새벽녘에 아이들과 한강에 가기로 했었다. 그러나 아무리 깨워도 일어나지 않았다. 몇 번이나 깨워봤지만 깊은 잠에 빠졌는지 소용이 없었다. 내 잠은 이미 달아나 버렸고, 아침까지 남은 시간은 멀기만 했다. 문득 혼자라도 어디든 다녀와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새벽 5시쯤 서둘러 차를 타고 나와 오랜만에 산으로 향했다.


내리자마자 깊게 퍼져오는 6월의 산내음은 무척 짙고 쾌청했다. 이슬이 가만하게 내려앉아 대지를 적시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아. 공기 좋다!” 말하고 깊은숨을 들이마시던 순간, 짙은 녹음의 향기는 내 안에 울려 퍼졌고, 그 공간에 온전히 스며든 기분이 들었다. 새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음악 같은 새소리를 들으며 새벽 산길을 오르고 올랐다.


평소에 걸을 땐 별 일 아니면 늘 뭔가를 듣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그런데 이 날 새벽은 전혀 그럴 필요가 없었다. 자연의 소리가 주는 평안한 정적이 참 좋았다. 아름다운 새소리를 내 귀로 직접 듣는 것 자체가 온전한 음악이었다.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세상의 미세한 뒤척임까지 들리는 듯했다. 그 고요함이 참으로 좋았다.


발자국마다 자그라지는 작은 돌들을 밟는 소리, 흙과 흙이 만나는 소리, 나무계단을 한 걸음씩 올라가는 소리들. 간혹 들리는 어르신들의 음악스피커 소리마저도 거슬리지 않았다. 모든 소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흐드러지게 핀 꽃들과 다양한 빛깔의 초록 무성함을 눈에 담았다. 분마다 달라지는 빛의 층위 위로, 초록의 색, 세상의 색채가 미묘하게 달라지고 있었다. 철저하고 충실하게 현존하는 존재들 덕분에, 6월의 싱그러움을 느낄 수 있음에 감사했다. 어딘가 과거와 미래를 조금씩 떼어 살아가는 나는 그 현존을 배우고 싶었다.

발걸음마다 마음을 새겨 넣었다. 결심도 넣었다가, 혼잣말을 심었다가, 다시 빈마음으로 툴툴 털어내기도 했다. 산등성이 옆으로 떠오르는 해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 길을 다시 걸을 땐, 그 마음들이 떠오를까. 랭보의 시처럼.



나는 여름 새벽을 껴안았다.

(…)

물은 죽은 듯 고요했다. 어둠의 진영은 숲길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나는 생기 있고 미지근한 숨결을 깨우며 걸었고,

그러자 보석들이 바라보았으며 날개들이 소리 없이 일어났다.

싱그러우면서 희미한 빛들로 이미 가득 찬 오솔길에서

첫 번째 시도는 나에게 이름을 말하는 꽃이었다.


- 아르튀르 랭보, 「새벽」 중에서



출발지점에 거의 다 도착할 때쯤이 되자 다소 피로감이 몰려왔다. 가지고 간 물도 다 마셔서, 음악의 힘을 빌려야 했다. 에어팟을 꺼내 한쪽만 끼고, 새소리와 함께 음악을 들었다. 오랜만에 나의 곡 <푸른 고요>를 들었고, 이어서 이곳에 어울리는 기타 연주곡을 꺼냈다.


https://youtu.be/aABPQADWo30?si=nMWfAsN0ddXU9taS


A Gift From Nature - Francesco De Grazia · Arielle Krebs



제목을 염두에 둔 건 아니었지만, 이 산책에 완벽히 어울렸다. 처음 이 곡을 들었을 때의 순간도 생각난다. 마음에 차분하게 다가오는 아련함이 또렷하게 있었다.


이 곡은 기타 하나로 나를 숲 깊은 곳으로 데려간다. 프랑스 출신 기타리스트이자 작곡가, 비주얼 아티스트인 아리엘(Arielle)과 이탈리아 출신의 기타리스트이자 작곡가, 프로듀서인 프란체스코(Francesco)가 함께 만든 곡이다. 앨범제목이 한눈에 들어왔는데 바로 “POEM”이었다.



이 앨범의 아이디어는 멕시코 유카탄 반도 앞바다에 있는 홀보쉬(Holbox) 섬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두 아티스트가 직접 쓴 시를 바탕으로 기타 솔로 곡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들이 작곡에 앞서 쓴 시의 한 구절(verse)을 음악으로 표현한 것으로, 10개의 곡이 모여 하나의 시적 내러티브와 음악적 여정을 이루고 있다.



1 Carried by the Breeze

2 On a Golden Coast

3 A Soothing Embrace

4 A Gift From Nature

5 Lulled by the Waves

6 On This Glowing Land

7 An Ever-changing Horizon

8 All Around Me

9 I Can Feel the Earth Breathe

10 As Time Stands By



이들의 이런 시도는 특히 더 특별하게 다가왔다. 보통은 기존의 시에 영감 받아서 곡을 만드는 경우가 많은데, 이들은 곡을 만들기에 앞서서 스스로 주체적으로 특정 장소에서 시를 먼저 쓴 후에 곡을 썼다는 점이다.



‘그곳에서는 시간이 기존의 개념처럼 흐르지 않고, 자연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숨이 멎을 듯 아름다운 풍경과, 간간이 들려오는 자연의 소리에 잠긴 침묵 속에서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내면으로 침잠하게 되고, 자신을 다시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지게 됩니다. 이 순간들을 관통하는 고요함과 평온함은 기타의 자연스러운 음색을 통해 그대로 전달됩니다.

이제 남은 것은 음악에 몸을 맡기고, 현실이든 상상이든 평화와 고요를 느낄 수 있는 장소로 떠나는 일뿐입니다.’


- 앨범소개 중에서



시간이 지나도 변치 않고 우리에게 영원처럼 다가오는 음악들은, 무어라 콕 집어 표현하기 어렵지만 ‘자연스러운’, 마치 늘 거기에 있었던 것만 같은 느낌을 주곤 한다. 이 곡도 내게 그렇다.

그날, 숲에서 들려오던 소리들과 향기와 음악을 나는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다. 그것은 아주 조용하고, 아주 곡진한 선물이었으므로.









참고

https://primaclassic.com/francesco-de-grazia-arielle-krebs-poem/

https://primaclassic.com/wp-content/uploads/2024/04/POEM-Booklet.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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