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시와 음악

눈빛은 말보다 먼저 도착하고

슈트라우스의 가곡 Morgen(내일)

by 윤슬




지난달, 론뮤익의 전시를 찾았다.

그의 인물 조각들은 정적이었고 묘하게 쓸쓸했다. 그 감정은 눈빛에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바닥을 향하거나 허공에 멎은 시선은 회피도 외면도 아니었다.

담담한 고요 속, 말 없는 결심처럼 그 자리에 머물렀다. 말이 없어도, 그 조각들은 이상할 만큼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었다.



나는 단숨에, 그 서늘하고 쓸쓸한 눈빛 속으로 빠져들었다.

타자는 부재하거나, 있다 하더라도 마음은 엇나가 있는 느낌. 보고는 있으나, 끝내 보지 않는 일방적인 회색빛 시선이랄까.


그 눈빛과는 끝내 눈을 맞출 수 없었고, 그 시선을 끝까지 따라가 내 눈을 포개본다면 무슨 기분일까 상상해 보았다. 다만 거울을 들여다보는 것 같은 두려움이 떠올라 선뜻 다가서지 못했다.


소통의 부재, 공감의 결핍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삶의 고단함, 이면적인 복잡한 감정들을 이렇게 이격 없이 적나라하게 눈빛 하나로 표현할 수 있다니. 그 시선 밖의 이야기들을 나도 모르게 떠올리게 되었다. 나는 어느새 론뮤익에게 묘하면서도 깊은 공감을 받았다. 너만 그런 게 아니야,라는 안도감마저 들 정도였으니까.


전시설명은 이렇게 덧붙였다. " 뻔하지 않지만, 누구나 한 번쯤은 겪어봤을 법한 보편적인 감성을 건드린다. 그 시선에 담긴 정서를 따라가다 보면 보는 이의 삶에 녹여진 우리만의 이야기 속으로 달려가게 해 준다."



그의 여러 작품들을 오랫동안 감상하고 나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마주칠 수 있는 눈빛과

마주칠 수 없는 눈빛 사이에는

아마도 '사랑'이 존재하는 것 같다고.


그렇게 론뮤익 전시장에서 쓸쓸한 침묵의 시선을 떠올리고 있을 때 나도 모르게 완전히 대조적인 눈빛 하나가 갈망처럼 떠올랐다. 오랫동안 좋아해 온 그림, 에델펠트의 <파리지앵>이었다.


알베르트 에델펠트(Albert Edelfelt, 1854-1905) <파리지앵> The Parisienne (Virginie), 1883, 조엔수 미술관



뚫고 들어오는 눈빛, 사랑의 눈빛


그림 속 여인, 비르지니.

그녀의 눈길이 사랑스럽게 향하는 곳에는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

그녀를 그리는 화가,

그녀를 사랑한 알베르트 에델펠트가 있다.


그녀의 눈빛은 분명 사랑에 푹 빠진 이의 눈빛이다. 부드럽고 따뜻하며 깊고 투명한 참으로 아름다운 눈빛. 그녀의 두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화가의 눈빛이 겹쳐져 있는 듯했다. 마치 네 개의 눈동자가 하나의 궤도 안에서 하나의 빛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기예르모 델 토로는 그의 창작 스케치 노트에 이렇게 적었다.


" 너의 눈이 없는 내 눈은 더 이상 눈이 아니다.

그저 두 개의 외로운 구멍일 뿐."


기예르모 델 토로의 창작 노트, 3권 24B쪽


비르지니와 에델펠트의 눈맞춤은 눈길을 만들었고, 그 길 위에는 사랑이 놓여있다. 그림에서 느껴지는 사랑의 궤도 안에서는 그 누구라도 사랑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 두 사람은 실제로 연인이었다.


론 뮤익의 조각도, 에델펠트의 회화도 모두 저마다 고유한 눈빛을 담고 있다.


말보다 먼저 도착하고

말보다 오래 남는 감정의 언어.

그것은 바로

눈빛이다.






눈빛이라는 언어


눈빛.

사전적으로는 ‘ 눈에 나타나는 기색, 눈에서 비치는 빛이나 그런 기운 ‘이라 한다. 영어의 gaze나 look으로는 담기지 않는 섬세한 정서가 있다.


'빛'이라는 접미사로 더 풍부해지고 특별해진 것도 의미심장하다.

눈이 무언가를 바라볼 수 있다는 건, 빛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빛은 세상의 만물을 드러내고 색깔을 입히고 감정을 비춘다. 시각은 모든 감각 중 가장 강렬하고, 우리는 그 인상을 통해 누군가의 마음을 본능적으로 읽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말한다.

눈빛만은, 거짓말하지 않는다고.

눈빛은 감정의 즉각적인 반사이며, 진심에 가장 가까운 언어가 아닐까.


때로는 단 하나의 눈빛이 수많은 말보다 더 깊은 감정을 전한다. 훌륭한 배우는 긴 대사보다 강렬하고 인상적인 눈빛 하나로 작품 전체의 서사를 관통하기도 한다. 감정의 결이 눈동자에 머무르고, 그 눈빛은 오래도록 관객의 마음에 남는다.

그렇게 눈빛은 마음이나 영혼의 상태를 드러내는 내면의 빛이며, 정신이 깃든 통로이자 가장 강력한 비언어적인 수단이기도 한 것이다.


오래전 그리스인들 역시 '보는 일'을 삶의 본질로 여겼다. 레지스 드브레는 <이미지와 삶과 죽음>에서 오이디푸스가 스스로 눈을 찔렀던 것을 이렇게 설명한다.


"그리스인들에게 산다는 것은 우리들처럼 숨 쉰다는 것이 아니라, 바로 ‘본다는 것’이었다. 또 죽는다는 것은 ‘시력을 잃는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 그는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고 말하지만, 그들은 '그는 마지막 눈길'을 거두었다고 말한다."


눈은 단순한 감각기관이 아닌, 존재의 증명이자 생명의 빛인 것이다.






시와 음악에 담긴 눈빛 - 슈트라우스 <내일>


파리지앵의 사랑의 눈빛을 시와 음악 안에서 더 헤아려 보고 싶었다.

헨리 맥케이의 시에 슈트라우스가 작곡한 가곡, <Morgen(내일)>을 천천히 감상해보면 그런 눈빛의 세계를 글과 선율로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른다.


https://youtu.be/jqPnSOdIlXA?si=AT8ijw8QQimXf4JN


R. Strauss : Op. 27, IV. Morgen - Matthias Goerne · Seong-Jin Cho



그리고 내일, 다시 태양은 빛나리,

내가 가는 그 길 위로 햇살이 내려오고,

그 길에서 마침내 우리는 다시 만나리라,

어제의 모든 슬픔과 아픔을 지나서.


Und morgen wird die Sonne wieder scheinen,

Und auf dem Wege, den ich gehen werde,

Wird uns die Glückliche wieder vereinen,

Trotz allem Gestern, das uns Leid getan.



그리고 넓고 푸른 물결 이는 바닷가에 서서

우리는 고요히, 아무 말 없이 내려가리,

우리 머리 위엔 하늘이 펼쳐지고,

구름 한 점 없이 맑으리라.


Und an dem Strand, dem weiten, wogenblauen,

Werden wir still und schweigend niedersteigen,

Und über uns vom Himmel Blässe schauen,

Weit, wolkenlos und rein wie eh und je.



그리고 우리는 손을 맞잡고, 그 손을 꼭 쥔 채

서로의 눈빛 속을 깊이 들여다보리라,

그러면 기쁨과 평화가 우리 안에 가득 차오르고,

모든 근심은 잠들고, 모든 아픔은 사라지나니,

오직 침묵 속에서 우리는 고요히, 행복하게

영원의 푸른빛 속으로 함께 걸어가리라.


Und werden Händ' in Hände fassen eng umschlungen,

Und blicken uns so tief in's Auge dann,

Daß Glück und Ruh uns überkommen ganz und gar,

Und jede Sorge schweigt, und jeder Schmerz vergeht,

Einzig im Schweigen gehen wir selig ohne Harm ins ew'ge Blau.



어떤 말도 필요 없는 순간,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만으로 존재의 모든 것이 전해지는 시간.

'내일'은 언젠가의 내일이었던 오늘이고, 내일이며, 다가올 미래의 모든 날들을 말하는 듯하다.

세상의 모든 것이 사라지고 오직 두 사람만이 남는 순간, 서로의 눈빛 속에서 각자의 존재를 확인하며 깊은 안식과 평화를 얻는다. 상대방의 눈빛은 곧 자신의 존재를 비춰주는 거울이 되며, 가장 순수하고 깊은 영혼을 교감하는 창이 되어준다. 슬픔을 초월한 희망, 그리고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는 순간이 시에서, 음악에서 조용히 흐르고 있다.


슈트라우스는 이 곡을 아내에게 결혼선물로 헌정했다. 총 4개의 가곡(Opus 27)중 마지막 곡인 <내일>은 아침 햇살처럼 빛나는 사랑과 희망을 품고 있다. 그래서일까, 이 곡은 결혼식의 축가로 종종 연주된다고 한다. 


https://youtu.be/yPTEdQ1mZX0?si=AQd5p0Uw1ng74um2&t=32


R. Strauss : Op. 27, IV. Morgen - 클라라 주미 강, 손열음



클라라 주미강의 바이올린 솔로로 편곡된 연주는 그 감정을 침묵 속에 더 깊게 새긴다. 차마 꺼내지 못한 마음이 활 끝에서, 손열음의 손 끝에서 한음 한음 차분히 피어난다.

아무 말이 없어도 전해지는 진심은 듣는 이의 마음속에서 스스로 빛을 낸다.

빛을 담은 눈빛은 말보다 더 정직하게 그 마음을 들려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눈빛에 삶이 드러난다고 믿는다. 기쁨, 슬픔, 사랑, 두려움, 분노, 연민, 경계, 신뢰, 깨달음, 미묘함 그 모든 복잡한 감정과 정신이 눈빛에 스쳐간다.


나는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살아내면서도 잃지 않고 싶은 것이 하나 있다. 맑고 살아있는 눈빛으로 존재하고 싶다는 것이다. 그 마음을 오래오래 지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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