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가만 부르는 노래
“ 노래를 들어봤는데,
참으로 한강처럼 말하고
한강처럼 부르더라.
한강 다웠어. “
작년 초겨울, 선배와 나눈 대화 속에서 이 말을 들었다. 시간이 지나 다시 떠올려보니, 이 말만큼 정확한 표현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 기다림 끝에 만난 『가만가만 부르는 노래』에서, 글로 남기고 싶었던 한 곡이 있다. 바로 〈12월 이야기〉다.
눈물도 얼어붙네
너의 뺨에 살얼음이
내 손으로 녹여서 따스하게 해줄 게
내 손으로 녹여서 강물 되게 해줄 게
눈물도 얼어붙는
12월의 사랑노래
https://youtu.be/F-1X4IHm5XM?si=5WWvmg5oCqTzKrNU
12월이 되고 겨울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니 이 노래가 자연스레 떠오른다.
흐르던 눈물이 얼어 살얼음이 되고, 그 살얼음을 내 손으로 녹여 강물로 만들어주겠다는 이 가사에 나는 큰 위로를 받았다.
눈물을 닦아주겠다는 말도 아니고, 울음을 그치게 하겠다는 말도 아니다. 그저 흐르는 눈물이 얼지 않게, 눈물이 눈물로 흐를 수 있도록 옆에서 머무르는 마음. 이 노래의 사랑은 그렇게 조용히, 오래 지속된다. 차가운 볼에 얹힌 누군가의 따뜻한 손등 위로 살얼음이 녹아내리고, 뜨거운 눈물이 덧없이 흘러간다. 이 노래를 들을 때면 그런 장면이 떠오른다.
겨울 외투 속의 풀빵 같은 노래
한강은 이 노래를 이렇게 설명한다.
“ 내 노래들 중에서 가장 단순한 노래,
가장 따뜻한 노래가 아닐까 싶다.
나에겐 이를테면, 겨울날 외투 속에 품고 가는 풀빵 봉지 같은 노래다.
가슴에 풀빵을 품고 가면,
같이 먹을 사람들은 따뜻하게 먹을 수 있고,
가는 동안 내 추위도 달래지고......
그런 마음. “
ㅡ 한강 『가만가만 부르는 노래 』 133p
노래가 태어난 시간
20년 전 겨울, 한강은 연극 <12월 이야기>의 공연 프로그램에 12월에 대한 짧은 글을 썼다.
눈물도 얼어붙는 달.
내 따뜻한 손으로
네 뺨의 살얼음을 녹여주고 싶은 달.
지하철 환승 구간을 걸어가다 이 문장에 멜로디가 붙었고, 그렇게 흥얼거리며 이 노래가 만들어졌다고 한다. 반주 없이 녹음된 이 노래는 연극이 시작되기 전, 관객들에게 조용히 들려줬다고 한다. 이후 2절과 3절의 가사가 다음과 같이 덧붙여졌다.
https://youtu.be/WpdLKjqRXMw?si=XTUsxYKGShtuxjVL
그리고 이 글을 다시 쓰면서 반가운 소식을 하나 접했다.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1주년을 맞아, 연극<12월 이야기>가 20년 만에 재연된다는 소식이다.
절판된 책을 찾아서
작년 10월,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을 들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이었다. 선배들과의 자리에서 한강이 직접 작사·작곡하고 노래까지 불렀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다.
2007년 1월 초판으로 출간된 이 책은 이미 절판 상태였다. 예약 가능한 유일한 도서관은 집에서 한 시간 넘게 걸리는 곳뿐이었지만, 망설임 없이 예약했다. 그렇게 기다리며 처음 이 책을 읽었다.
1년 전, 읽고 쓰다 만 글을 마무리하고 싶어 얼마 전 다시 책을 빌려 읽고 있다. 이번에는 기다림 없이 바로 대출이 가능했다. 보통 절판된 도서나 고서는 구립보다 교육청 산하 도서관에서 많이 소장하고 있다.
글을 쓰는 사람의 음악
이 책에서 한강은 자신의 삶 안에서 피아노와 음악이 어떤 의미였는지, 어떤 곡들을 사랑했고 왜 기억에 남았는지를 들려준다. 그리고 직접 만든 이 노래들이 어떻게 태어났는지도. 부록으로 CD에 음원도 담겨져 있다.
작곡가 한정림을 만나며 이 프로젝트는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한강은 작사와 작곡, 노래를 맡았고, 한정림은 편곡과 피아노 연주, 음반 작업 전반을 이끌었다.
몇몇 곡은 『채식주의자』를 집필하던 시절, 꿈에서 들려온 노래였다고 한다. 잠에서 깨어 대부분은 의식 저편으로 사라졌지만, 기억에서 사라지기 전에 급히 가사와 계이름을 적어 내려갔다고 한다. 글과 음악이 얼마나 가까운 곳에서 흘러나왔는지 짐작할 수 있다.
까맣게 타버린 가슴의 기억
어려서부터 노래를 좋아한 한강은 음악 시간을 좋아했고, 리코더 불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피아노를 배우고 싶었지만 형편 때문에 그럴 수 없었던 기억. 한강은 그때 처음으로 ‘가슴이 까맣게 탄다’는 느낌을 초등학교 5학년 때 처음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 후에 문방구에서 10원짜리 종이건반을 사서 책상 앞에 붙여두고, 소리는 나지 않지만 고개를 까닥거리며 신나게 쳤다고 한다. 본인에겐 그저 아이다운 낙천성이었지만 그 모습은 어머니의 그 시절에 가장 힘든 순간이었다고 전한다.
나 역시 잊고 있던 감정이 문득 떠올랐다. 7살 무렵, 주어온 고장 난 토이피아노를 종일 신나게 쳤던 기억이 났다. 건반이 한두 개 없어도, 소리가 이상해도 내겐 끝없이 기쁘고 즐거웠던 피아노였다. 어느 날 갑자기 그것이 뻥튀기로 바뀌면서 그때 처음으로 무언가를 잃는 기분을 알았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작곡과에 가고 싶다고 했다가 여러 사정으로 거절당한 기억까지 이어진다. 그때 나도 같은 말을 마음속에서 되뇌고 있었다. 가슴이 까맣게 타들어 간다고.
인생은 알 수 없는 물방울들의 튐이 계속되는 것 같다. 그 물방울을 어떻게 맞이하느냐에 따라 흩날려 소멸해버리는 한 방울일 수도 있고, 거세게 밀려오는 파도일 수도 있다. 이 책을 읽고 느낀 것은 한강에게 음악은 큰 의미였지만, 글쓰기라는 더 크고 강하면서도 자연스러운 파도에 올라타 자신만의 궤적을 깊게 그려간 것이 아닐까 싶다.
직접 노래를 부른다는 것
한강은 자신의 노래를 직접 부르는 일에 대해 끝까지 고민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노래의 감정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불러야 한다고, 잘 부르려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불러달라는 한정림의 설득 끝에 결국 마이크 앞에 섰다.
그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한강의 낭독 영상을 처음 보았을 때 느꼈기 때문이다. 수없이 고쳐 쓰고, 그 누구보다도 더 오래 생각하고 머물렀던 문장들은 결국 한강의 목소리보다 더 진실하게 전달할 수 있는 사람은 없겠구나, 하고 말이다.
류이치 사카모토도 본인이 쓴 곡을 연주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연습을 반복했다. 세계 최고의 기량을 가진 연주자가 대신 연주해 주면 더 좋은 점도 있겠지만, 그 곡을 쓴 당사자가 연주할 때만이 나올 수 있는 원초적인 고유함이 있다고, 나는 믿고 있다.
이 노래를 떠올리다 보면, 차가운 풍경 속에서도 아주 작은 온기가 따스하게 남아 있는 지오반니 세간티니의 목가 그림이 떠오른다. (그림 출처 : https://artuk.org/discover/artworks/an-idyll-107854)
올해가 가기 전 12월에는 꼭 이 글을 써내고 싶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계절을 하루하루 살아가며, 얼지 않게, 무너지지 않게, 조용히 곁에 머무는 마음을 믿으면서 말이다. 이 책에서 여러 문장들을 옮겨 적어 두었다. 이 글에 모두 담을 수는 없지만, 음악이 주는 위로에 공감되는 문단을 가져오며 글을 마친다.
“내가 울 때 눈물을 닦아주거나, 내가 영혼을 팔았을 때 그걸 되사서 나에게 줄 사람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노래를 듣다 보면 일어날 힘이 생기고, 온몸이 터져나갈 듯한 만원 지하철 속으로 다시 뛰어들 용기가 생겼다. 어떤 종교도, 위로해 줄 애인도 없을 때, 때로는 그렇게 노래 하나가 거짓말처럼 일상을 버텨주기도 한다. “
ㅡ 한강 『가만가만 부르는 노래 』 (당신에게 내가 필요했다니 p. 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