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관을 부수고 나온 시간여행자, 12대의 스트라디바리

12 Stradivari - Janine Jansen

by 윤슬



샤넬백을 되팔아 수익을 남기는 ‘샤테크’, 한정판 운동화를 사고파는 ‘슈테크’. 이제는 그림뿐 아니라 악기까지도 ‘악기테크’라는 이름으로 매력적인 투자자산 목록 중 하나가 되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널리 알려진 명품악기의 대명사는 단연 스트라디바리 바이올린이다. 세계 최대 현악기 온라인 경매사이트 타리시오(Tarisio)에 올라온 이 명기들의 숫자는 놀라울 정도다.


Tarisio 홈페이지



좌: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 Lady Blunt 우 : 주세페 과르네리 델 제수 Baltic



Stradivari – 약 1,582만 달러 (현재 환율로 약 266억)

제작자 :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

제작연도 : 1721년

바이올린 이름 : Lady Blunt (시인 바이런의 손녀인 앤 블런트가 약 30년간 소유)


Guarneri ‘del Gesù’ – 약 944만 달러 (약 129억)

제작자 : 주세페 과르네리 델 제수

제작연도 : 1731년

바이올린 이름 : Baltic (50년간 컬렉션에 보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전시 경력)



1. 숫자로 갇힌 악기, 울림을 잃은 예술


현존하는 약 750여 대의 스트라디바리 바이올린 중 최고의 악기들은 지금도 연주자의 손에 들려 전 세계를 누비고 있는가 하면, 어떤 것들은 철저히 보관된 채 좀처럼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과거에는 주로 재단에서 음악가들에게 연주하게 할 목적으로 이런 악기들을 사들였다. 하지만 지금은 안전한 자산으로 투자하는 투자가가 많아진 것이다.

게다가 유명 연주자에게 악기를 대여하면 악기의 가치가 상승한다. 이타심과 투자 이익이 맞물리는 셈이다. 그러나 보험과 이해관계의 복잡성으로 인해 대여도 쉽지 않다고 한다. 결국 악기를 연주하기보다 보존하고 거래하는, 소리보다 숫자의 의미가 커져가는 시대인 것이다.



2. 숫자는 모든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숫자는 단순하고 직관적이다. 그래서 우리는 숫자로 객관적인 가치를 판단하는 지표로 삼는다.

그러나 숫자는 존재가 지닌 절대적인 가치까지 대변할 수 있는 것일까? 의구심이 든다. 단순히 보이는 숫자 이면에는 다각적이고 복잡한 맥락과 쉽게 설명되지 않는 것들이 분명히 있다. 숫자의 탈에 가려 예술의 본질이 온전히 보이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예술은 보존되어야 할까, 아니면 울려야 할까?

음악은 소리의 예술이다. 악기는 연주되어야 비로소 존재 의미를 가진다.


어딘가에 조심스럽게 보관만 되고 있는 악기들. 정말 살아있는 것일까?

역사적 가치가 오른다고 해서 그 악기의 진정한 가치가 보존되는 것일까?

나는 악기가 투자자산이라는 숫자만으로 명징되는 순간, 그것은 박물관이나 유리관 속의 시간의 무덤에 갇혀버린 영혼이 된다고 생각한다.

소리 없이도 아름다울 수 있을까? 나는 적지 않은 시간 동안 그 질문을 불편한 마음으로 안고 있었다.



3. 박물관은 예술의 무덤이다


사진작가이자 건축가 스기모토 히로시는 GQ Japan 인터뷰에서 말했다.


“박물관의 유리 너머만 보고서는

전달이 안 되는 것들이 있죠.

박물관은 예술의 무덤입니다.

결국 사람의 손으로 만지고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


그 마음을 알아들었다는 듯, 시간을 거슬러 악기들이 되살아나는 사건이 있었다.

바로 ‘12대의 스트라디바리 프로젝트’다.



4. 유리관을 부수고 나온 12대의 스트라디바리


photo by Hugo Burnand, 재닌 얀센 홈페이지


이 흥미로운 프로젝트는 세계적인 현악기 딜러 J&A 비어의 대표, 스티븐 스미스의 발상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전 세계에 흩어져 있던 스트라디바리 12대를 런던으로 불러들여 2주간 머물게 하며, 그 기간 동안 녹음과 다큐멘터리를 제작해 각 악기의 탁월함과 개성을 기록하고자 했다. 그는 바이올리니스트 재닌 얀센에게 이 프로젝트에 참여할 것을 제안했고, 그녀는 주저 없이 수락했다.


이런 프로젝트는 거의 실현 불가능에 가깝다고 한다.

많은 재단과 박물관, 개인 소장자들은 그간 악기의 외부 이동을 한 번도 허락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중엔 최근 수십 년 동안 연주되지 않은 악기도 있고, 최초로 녹음하게 된 악기도 있다.

게다가 몇몇 악기들은 코로나 봉쇄 중인 국가에서 운반되어야 했다. 그럼에도 스미스는 이 모든 것을 성사시켰다. 아마도 이 열정과 실행력은 재닌 얀센과 안토니오 파파노에게 큰 영감을 주었을 것이다.


얀센과 파파노는 바이올린과 소유자의 특징에 따라 어울리는 곡들을 선정하여 15곡을 녹음했다.

재닌 얀센은 스미스가 이 프로젝트를 제안했을 때, 평생 단 한 번 뿐일 기회라는 걸 바로 알았다고 한다. 마치 최고의 사탕가게에 들어간 아이처럼 그녀는 각 악기를 만나는 과정을 즐겼다.


https://youtu.be/VlBDl9vcwsA?si=2nhi2rMj9Ndb74ND

프로젝트 다큐멘터리 <Falling for Stradivari>의 트레일러영상



photo by Hugo Burnand, 재닌 얀센 홈페이지


5. 소리로 부활한 시간


나는 이 앨범 중 3곡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첫 번째는 엘가의 Sospiri

https://youtu.be/LlNRa96hluc?si=kmJGVbLyUl0J1dmS

Elgar: Sospiri, Op. 70: Sospiri, Op. 70 (Arr. for Violin and Piano)


이 곡에선 왜인지 모르게 사람 목소리가 들린다. 만약 눈물이 말을 한다면 이런 소리였을까. 슬픈 비명의 소리가 바이올린에서 나온 것인지, 재닌 얀센의 손끝에서 나온 것인지 그 경계는 흐릿하게 오간다.

때론 절규의 목소리가 들리기도 하고, 때론 사라질 듯 미세한 숨결 사이에서 내면의 절박함이 나온다. 긴 호흡으로 자조적인 슬픔을 조용히 나긋하게 말한다. 소멸하듯 사라져도 결코 소멸하지 않는 모든 것들이 머무르고 있는 것처럼.


사용된 바이올린은 1717년 제작된 “ Tyrrell” 스트라디바리이며, 한 때 영국인 에드워드 티렐이 소유해서 그 이름을 따온 것이다. 현재는 유럽의 한 익명의 개인 소장가가 보유하고 있다.



두 번째는 차이코프스키의 Melodie

https://youtu.be/zRkJ5JXXxJs?si=zYns6pIxUWJcv-9J

Tchaikovsky: Souvenir d'un lieu cher, Op. 42: 3. Mélodie. Moderato con moto (Ed. Auer)


서정적인 선율과 함께 빈티지한 음색이 귀를 사로잡는다. 1715년 제작된 “Titan” 스트라디바리는 마치 과거에서 건너온 시간여행자와 만나는 기분이 든다.



세 번째 곡은 프리츠 크라이슬러의 Syncopation

https://youtu.be/2ftrkyurjV4?si=lagOVdRH3Li563eA

Kreisler: Syncopation


밝고 경쾌한 에너지가 살아 있고 미묘하게 밀고 당기는 리듬감이 매력적인 이 곡은 2년 전 내가 처음 이 앨범을 알게 해 준 곡이다. 이 곡에 사용된 바이올린은 1734년 제작된 “Kreisler, Lord Amherst” 스트라디바리로, 실제 크라이슬러가 소유하고 사용했던 악기다.

이 악기에서는 곱게 정제된 깊은 그윽함이 느껴졌다. 마치 시간이 품어낸 진주의 물결로 한번 걸러져서 단단하고 농밀해진 그윽함이 아름답게 배어난듯하다.






6. 울려야 존재하는 것들


스트라디바리 바이올린의 이 특별한 이야기들을 보고 있으니 각 악기마다 거쳐간 손길들은 마치 연대기 같고, 살아있는 이력서처럼 느껴진다. 앞으로도 악기들의 경력 속에 연주자들의 시간이 쌓이고, 그 축적된 시간이 다시 하나의 생생한 진동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 소유가 아닌 소리로 태어나는 일이 계속되었으면 좋겠다.


음악이라는 예술이 존재하는 가장 창조적이고 생명력 있는 방식은 그림자에서 나와 세상에 소리로서 살아갈 때이다.


악기는 유한하게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충만한 소리의 밀도로

세상에 울려 퍼지며 무한하게 존재할 때


비로소 누군가를

아름다움으로

사랑으로

견디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순간의 선율,

공감의 눈물,


음악이

누군가를 구원할 수 있다고 장담할 수는 없지만,

살아갈 수 있도록

지탱해 주는 한 줄기 빛이 될 수는 있다고,

나는 믿는다.

우리는 소리로 사랑하고

울림으로 존재한다.






참고자료

https://www.janinejansen.com

https://www.beares.com/janine-jansen-12-stradivari-recording/

https://www.medici.tv/en/concerts/janine-jansen-and-12-stradivari-antonio-pappano

https://theclassicreview.com/album-reviews/review-12-stradivari-janine-jansen-antonio-pappa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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