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요일의 슬픈 Bittersweet 』연재를 시작하며
나는 슬픈 음악을 사랑한다.
달려도 달려도 닿지 않는 고향처럼
불러도 불러도 닿지 않을 나의 노래처럼
가슴 시리고 눈물을 자아내게 하는
마음속에 막지 못할 구멍이 있는 것처럼
사무치는 서러움에 힘겨운 마음
늦가을의 마지막 잎새에
시린 바람이 매섭게 부는 황량한 마음
슬픈 음악을 들으면
왜 슬픈지도 모른 채
늘..
마음을 그렇게
송두리째 가져갔다.
슬픔이란 무엇인가?
자신, 또는 남의 불행이나 실패의 경험, 예측 또는 회고(回顧)를 수반한 우울한 정서를 말한다.
혈액순환이 약해지고, 호흡이 느려지며, 안색이 창백해지고, 흔히 눈물을 흘린다.
슬픔은 인간의 보편적인 감정중의 하나로
기쁨보다 훨씬 더 보편적이다.
그렇다.
인간의 가장 보편적인 감정,
타고난 성향,
내가 좋아하는 음악이 더해져서
슬픈 음악, 멜랑콜리한 음악, 달콤 씁쓸한 음악이
언젠가부터는 내 정체성의 하나가 아닐까?
그렇게 슬픈 음악이 찬란하게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수전케인의 『 비터스위트 』 에서 인용한 연구사례 2개를 발췌했다.
1. 슬픈 음악과 관련된 모든 연구 문헌을 검토
최근 학술 연구 중에서 신경과학자 매튜 삭스 Matthew Sachs와 안토니오 다마시오 Antonio Damasio 가 심리학자 아살 하비비 Assal Habibi와 함께 슬픈 음악과 관련된 모든 연구 문헌을 검토한 뒤,
갈망적 멜로디가 신체의 항상성(감정과 생리 기능이 최적 범위 내에 있는 상태)을 끌어내는 데 도움이 된다고 단정 짓기도 했다.
게다가 여러 연구를 통해 신생아 집중치료실에서 (대체로 구슬픈) 자장가를 듣는 아기들이 다른 종류의 음악을 듣는 아기들에 비해 더 힘찬 호흡, 섭식 패턴, 심박동수를 보이는 것으로 증명되고 있다.
2. 서신을 바탕으로 살펴본 유명 작곡가 3인의 행복과 창의성
2017년에는 캐롤 얀 보로웨키 Karol Jan Borowiecki라는 경제학자가 <경제학 통계학 리뷰>에 ‘ 안녕하십니까, 친애하는 모차르트 씨? 서신을 바탕으로 살펴본 유명 작곡가 3인의 행복과 창의성’이라는 제목의 흥미진진한 연구 사례를 게재했다.
보로웨키는 언어분석 소프트웨어를 이용해 모차르트, 리스트, 베토벤이 일생 동안 쓴 서신 1,400통을 연구했다.
그는 3명의 편지가 (행복 같은 단어로) 긍정적 감정이나, (슬픔 같은 단어로) 부정적 감정을 언급한 경우를 추적해 이런 감정들을 언급한 시기에 작곡한 음악의 분량과 특성에 대해 어떤 관계가 있는지 살펴봤다.
그 결과
3명의 예술가의 부정적 감정이
그들 자신의 창의적 결과물에 연관성이 있을 뿐만 아니라 예측성까지 띠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한편 모든 부정적 감정이 이런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니었다. 단조 음악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음악으로 표현되는 부정적 감정 중 슬픔만이 우리의 기분을 북돋워 준다는 사실을 발견했듯, 보로웨키 역시
슬픔이 ‘ 창의성을 분발시키는 주된 부정적 감정’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치열하게 내면을 직관하고 돌아보기 시작하면서
나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법을 조금씩 배우고
내가 좋아하는 음악의 공통적인 결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슬픈 아름다움을 일으키는 감정에 날 고양시키는 것들이 무엇인지,
그 안에 어떤 공통점이 있을지 모아놓고 살펴보면
거기에 나를 완전히 수용할 수 있는 발판을 발견하고
내가 표현하고 싶은 음악이 있지 않을까?라는
마음의 흔들리지 않을 근거를 확약받고 싶었다.
발견하지 못하더라도
비터스윗한 음악은
늘 내게 행복과 위안을 안겨다 주니
괜찮다.
괜찮다.
슬픈 사람에게는 애달픈 가락이 가장 달콤한 음악이다.
- P. 시드니(영국의 시인)
어떤 음악언어가 비터스윗함을 느끼게 해 주는 걸까?
소리의 재료?
선율?
화성?
단조?
편곡?
리듬?
가사?
그렇다면 신나는 리듬에 슬픈 가사를 담으면?
리듬만 듣는 사람들에게 슬프게 다가갈까?
가사만 듣는 이에겐 슬픈 음악이 될까?
선율이 절절하고
단조여도
가사가 찬란한 사랑과 기쁨을 그리고 있다면
그건 슬픈 음악이 될까?
음악은 다수와 함께 듣기 위해 만들어지고
음식은 다수와 함께 먹기 위해 만들어지고
책도 다수와 함께 읽기 위해 써진다.
어느 정도의 다수가 그렇다고 공통적으로 느끼는 것이라면 그 자체로도 의미가 크다.
또 문화권, 지역마다 또 달라질 것이고
관점이나 기준을 어디에 둘 것인지에 따라서도 달라질 것이다.
하지만 창작자를 위해서 만들어 지기도 한다.
행위 자체가 구원인 것.
다수의 감성과 떨어져 있다 하더라도
그냥 내가 좋다고 느끼는 것들을
편견 없이,
나의 울림으로 느껴지게 표현하다 보면
내 음악의 언어가 길이 되어
점점 다수의 마음을 어느 정도 품을 수 있게 자라날 거라 믿는다.
https://youtube.com/watch?v=v8lrQQ9zyvk&feature=shares&t=4
아이들 어릴 때 자장가로 자주 불러준 노래 중 하나는 섬그늘 아기였다.
품에 안고 토닥이며 불러주면 참으로 따뜻한 곡이지만 가사를 들어보면 참 구슬프다.
큰아이가 4살 때 어느 날이었다.
이 노래를 들으며 울음을 터트렸다.
가사에 담긴 의미를 어렴풋이나마 마음으로 들은 게 아니었을까?
슬픈 공감이 크게 일렁인 것.
낯선 외국어의 슬픈 노래가 들릴 때
무슨 가사인지 몰라도 슬픈 가락에 마음을 빼앗겨 눈물이 주르륵 나기도 하니까.
그런 감정의 잔해들.
군중 속에서의 고독,
날 힘들게 하는 마음,
느껴지지 말아야 하고 없애야 할 것처럼,
그 반대의 모습이 되어야 한다며 애쓰고
문제라고 채찍질했던 시간들.
끊임없는 부정적인 의문에 시달리는 불안함은
‘수용’이라는 온전한 품어줌 앞에 날려버리고 싶다.
슬픔이 아름답다면 모순 같지만,
슬퍼서 아름답다.
씁쓸함과 달콤함의 어우러짐이다.
이것이 나를 찾아가는 여정 속의 보물이라면
세상에 흩어져있는 그 조각들을
하나하나 모아 연결하고,
나만의 언어로 통합하다 보면
표면 위를 이슈 따라 가볍게 부유하다 떠돌다 사라질 음악이 아닌
시대를 거스르는 나만의 단단한 음악지층을 쌓아 올릴 수 있지 않을까?
이것들을 찾아가는 과정 하나하나가
나만의 길을 찾고 걸어 나갈 수 있을 거라는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
작가 C.S루이스는
기쁨의 고통에 압도되었던
어떻게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을 느낀 후,
남은 평생토록 그 느낌을 말로 표현하고,
그 근원을 찾고,
경이로운 그 “ 찌르는 듯 날카로운 기쁨”에
자신처럼 친숙한 동류의 사람들을 찾으려 힘썼다고 한다.
루이스 작가처럼,
나도 누군가의 어두움과 슬픔에 진실로 공감하며,
따뜻하게 위로하는 마음을 글과 음악으로 꾸준히 전하고 싶다.
나를 나이게 할 수 있도록.
나는 슬픈 노래가 좋다.
그 슬픔을 싣고
흘러가는 멜로디의 기쁨이 좋다.
나는 즐거운 노래가 좋다.
그 즐거움을 따라가며
웃는 슬픔의 조용한 미소가 좋다.
- 김진영, 『 아침의 피아노 』
매주 『 수요일의 슬픈 Bittersweet』매거진으로 제가 좋아하는 슬프고도 아름다운 음악에 대해 나눕니다. 그저 알고 싶고, 깊게 느껴지는 것을 ‘왜?’라고 스스로에게 물으며 저만의 시선으로 편하게 쓰려고 합니다.
다음 주 수요일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
오늘밤 편안히 푹 쉬시고,
내일도 소소한 행복 잘 발견해서 내 걸로 꼭 만드시는 하루 보내시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