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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Jun 16. 2024

조율의 시간, 도움을 주고받는 인생의 기쁨

Brad Mehldau - Prelude to Prelude


얼마 전 8개월 만에 피아노 조율을 다시 받았다. 낮은 솔 건반이 소리가 나지 않기도 했고, 조만간 다시 받을 것을 권유하셨기 때문이다.


나의 오랜 친구 피아노

꼬박 서른일곱 해를 내가 가는 곳마다 함께 다닌 이 친구는 이젠 내 나이를 훌쩍 넘어선 노년이 되었다.  한 때 이 녀석을 데리고 가야 할지 고민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층간소음과 편리함 속에서 점점 일반화된 디지털피아노와 사일런트 피아노가 자리 잡은 이 세상 속에서도 꿋꿋하게 잘 견뎌왔다. 그 어떤 좋은 건반이라 하더라도 결코 어쿠스틱 피아노를 따라갈 수는 없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어

조율사님이 날 부르셨다. 여길 보라시며 해머 하나를 보여주신다. 나의 친구 해머는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것도 줄과 직접 닿는 부분이 넓고 깊게 파여 주름진 채로 말이다.


삶의 굴곡이 세월 속에 켜켜이 담겨 두껍고 자연스럽게 굳은 노년의 거뭇거뭇한 피부 같았다. 해머를 감싼 펠트층층이 줄을 타건하며 내는 세밀함이 있는데, 그 피부가 딱딱해지고 쪼그라들어 색채의 밀도를 둔감하고 거칠게 받는다고 해야 할까. 비단 해머만 낡아버린 것은 아니었다.  

그러면서 좋은 매물 하나를 보여주시는 조율사님.. Oh No......


살짝 흔들렸다, 하지만

페달을 받치고 있는 밑판이 무너졌고, 공간을 옮길 때마다 운반비를 따로 지불해야 하며, 층간소음으로 자유롭게 치기도 어렵고, 공간도 제법 차지한다. 안에 해머들만 갈아볼까? 그럼 낡은 줄은 어떻게 하지?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아, 이런! 이게 중요한 건 아닌데.


건반을 다 드러내고 구석구석 먼지를 청소하다


세상을 다 가졌던 마음을 잊지 않기

하지만 마음이 말한다. 널 버리지 않을 거라고. 늙으면 늙어가는대로 그대로 함께 가자고 말이다. 피상의 바다를 건너 진정한 것을 보자고 말이다. 어떠한 상황에도 내 손가락을 더 세심하게 움직이는 의지와 본질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형편이 넉넉지 않음에도 부모님께서 애써 마련해 주셨던 소중하고 귀한 피아노. 아직도 이 피아노가 우리 집에 들어오던 그날이 생생하다. 사다리차도 없던 시절, 기사님들이 이 피아노를 이고 지고 아파트 4층까지 낑낑 들어 옮기셨던 날, 난 세상을 다 가졌었다.


우리의 세월로 함께

이젠 두 아이도 함께 치는 나의 오랜 친구는 나뿐만이 아니라 아이들의 성장도 지켜보고 있다. 내가 만약 피아노를 새로 사게 된다 하더라도 버리지 않고 항상 내 곁에 두겠다고 약속했다. 소리를 잘 내지 못해도 괜찮다고. 시간과 세월을 머금은 그 소리 그대로 유일무이한 너대로 완벽하다고. 내 옆에서 나란히, 우리 세월로 함께 있자고 말이다. 내 모든 걸 다 받아준 나의 사랑하는 든든한 옛 친구!


그래도 핫딜은 기다리지

대신 미디작업책상의 마스터키보드가 들려줄 또 하나의 피아노 가상악기 핫딜을 기다린다. 급한 것은 아니어서 50% 할인까지 기다리고 있다. 가상악기는 컴퓨터 안에 들어가는 악기라 공간을 차지하지 않는 장점이 있다. 이미 5-6개의 가상악기 피아노가 있지만 피아노를 기반으로 하고 있으니, 보다 더 다양한 빛깔의 피아노를 가지고 있으면 펼칠 수 있는 스펙트럼은 더 넓어지지 않을까.



인생의 조율도 다부지게 할 수 있다면

피아노도 소리가 나지 않거나, 음정이 변하면 이렇게 조율사님을 불러서 줄을 조이고, 구석구석 청소를 하고, 고장 난 것들을 고쳐야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 있다.

사람도 때론 멈춰가야 할 땐 멈춰 서고 쉴 땐 온전히 쉬며 필요한 공백의 숨을 불어넣기도 해야 한다. 물론 가끔은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공백조차 잉여롭게 느껴질 때도 있다. 하지만 마음을 자꾸 환기시키고, 변화를 시도해 보며 조율의 시간을 마땅히 받아들이는 여유가 진정 필요하지 않을까?


인간은 그저 하나의 미물임을 잊지 말고, 자기 불확실성은 누구나 갖는 지극히 정상적인 거라 생각하면 수많은 넘어짐과 실패를 기꺼이 당연하게 감내할 수 있지 않을까. 포기하고 절망을 선택할 때 역설적으로 새로운 희망과 사랑이 돋아날 수도 있으니까.



짐은 함께 나눠가져도 되는 것

가뜩이나 힘들고 각박한 삶, 다른 이에게 짐을 지어주는 것이 미안하고 싫어서 혼자 이고 지는 것이 더 편했다. 하지만 이제 아주 조금이라도 그 짐을 나눠갖기 시작했다. 내 카톡은 24시간 열려있다는 선배, 연락 안 하고 아무 때고 그냥 오라는 친구가 건네는 마음에 위안을 얻는다. 하지만 여전히 기꺼이 그러지는 못하고 있다. 좋은 것을 나누듯이 힘든 마음도 나누면 될 것을, 내가 손을 내밀지 않았을 뿐이다. 내 편은 이미 내 곁에 있었던 것인데도. 힘겨울 땐 진정으로 믿는 이들에게는 마음을 기대도 되는 것을. 도움을 주고받는 것은 인생이 주는 큰 기쁨이란 것을 오랫동안 잊고 살았다.



피아노 덕분에 도움을 주고받는 시간을 보내며

지난 목요일에 피아노 영상촬영을 했다. 이번 싱글곡은 피아노곡인데 이전 음원들처럼 직접 영상을 만들 힘과 여력이 솟아나지 않았다. 스탁 사이트에서 영상소스를 고르고 있어도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다. 막막했다. 음원만 발표해야 할지를 고민하다가 피아노음악에 영상 입히는 것을 좋아한다고 하셨던 감독님의 말씀이 불현듯 떠올랐다. 톤을 일관되게 하고 싶어서 소스를 이용한 영상의뢰를 했다. 감독님께 곡을 들려드렸더니 아티스트로서의 관점으로 조언을 해 주셨다. 직접 피아노 치는 모습의 영상을 담아 보는 것은 어떠냐는 제안을 하신 것이다.


제법 오랫동안 위축되어 있었기에 시간을 두고 깊이 고민했다. 결국 큰 용기를 냈고 생각지도 못한 촬영을 하게 되었다. 긴장한 탓에 전날엔 잠도 거의 못 자고 엄청 많이 떨어서 실수도 많았다. 하지만 동시에 그 시간이 너무나 감사한 것이다. 이 과정 역시 결과를 떠나서 도움을 주고받는 큰 기쁨이며 경험이자 의미 있는 도전이었다. 많은 배려를 받은 상황이었기에 감사함은 더 클 수밖에 없었다.


M/V촬영현장, 평소 같지 않은 내 모습이 낯설어도 즐거웠다







악보로 바흐를 새롭게 만나는 시간

상담받는 날은 오롯이 나를 위한 반나절을 보내곤 한다. 이 날은 서점에 가서 바흐 악보를 샀다. 오랫동안 한 곳에 늘 한결같이 머무르는 존재는 큰 위로가 된다. 30년 넘게 들락날락한 이곳이 바로 그렇다. 유독 악보를 살 땐 가능한 여기서 사곤 한다. 앞서 말한 이유에 더해 전체를 조망할 수 있다는 장점, 즉 같은 곡이어도 내게 더 잘 맞는 악보로 고를 수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 알게 된 것이지만 악보! 하면 주로 대한음악사를 주로 간다고 하는데, 기회가 되면 그곳도 한 번 가보고 싶다.


내 못난 소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내 친구 피아노와 함께 악보를 보며 바흐, 류이치 사카모토, 포레를 만났다. 피아노 조율을 배워도 좋겠다는 생각이 다시 떠오른 날이었다. 오늘 오후도 내 피아노와 함께 악보 속의 그들을 만나러 갈 것이다.




https://youtu.be/tSJEJLBaUPc?si=Xi75eFAQxBk0cpvc


Prelude to Prelude - Brad Mehldau (After Bach 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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