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하치노헤의 하치 포탈 뮤지엄
일본 동북부 아오모리현의 하치노헤시는 태평양을 마주하고 있는 어촌도시이다. 오징어가 도시의 상징일 만큼 일본 최고의 오징어 어획량을 자랑하기도 한다. 불현듯 태평양과 오징어 두 가지에 끌려 아오모리시로 가려던 일정을 갑작스레 변경했다. 하치노헤 기차역 로비에 익살스럽게 의인화된 오징어 모형의 모습에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낯선 곳에 도착했을 때 으레 느낄 수 있는 두려움이 스르르 가벼워졌다. 제일 먼저 역에 있는 관광안내소를 찾았다. 젊은 직원이 여러 개의 소책자를 보여주며 꼭 가봐야 할 뮤지엄과 태평양 연안으로 가는 방법, 먹을거리 등을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바닷가로 가는 열차 시간을 기다리며 직원이 적극 추천한 하치 뮤지엄으로 향했다. 기차역은 외곽에 있었기 때문에 시내 중심에 위치한 뮤지엄에 가기 위해 15분 정도를 걸어야 했다.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골목에는 인적이 드물었다. 일본 특유의 정갈하고 고요한 분위기가 조금은 스산하게 느껴지는 길이었다. 그러나 걸음을 재촉하는 나의 시선을 끈 것이 있었다. 상점 담벼락 위에 몇 줄의 일본어 문구가 말풍선 안에 적혀있었다. 한 곳에만 적혀있었다면 무심히 지나쳤을 것인데 골목을 지나며 몇 번을 마주하고 나니 이게 무엇인가 호기심이 들었다. 일본어를 읽을 줄 모르는 나는 이 문구들을 사진으로 기억할 수밖에 없었다. 후에 찾아보니 말풍선들은 하치노헤의 마을 살리기 프로젝트 중 하나라고 한다. 마을에 퍼진 풍문들을 모아 상점의 벽에 적어 주민들이 더욱 친근하게 소통하는 것이 그 목표이다. 이처럼 하치노헤는 주민들의 자발적인 노력으로 마을 활성화가 이루어지는 곳이었다.
관광안내소 직원이 추천해준 하치 포탈 뮤지엄은 마을 활성화 프로젝트의 중심에 있는 곳이었다. 반신반의한 마음으로 뮤지엄에 도착했을 때 그 입구에서부터 지역에 대한 자부심을 물씬 느낄 수 있었다. 자동으로 열리는 유리문을 들어서자 하치노헤의 명물 중 하나인 사자 머리 모양 목각 인형 수십 개가 양 쪽으로 늘어서 방문객을 맞이하고 있었다. 빨강과 검정으로 칠한 목각 인형을 처음 마주했을지라도 단박에 지역의 자랑이구나 느낄 수 있을 만큼의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인형들 사이를 지나니 맞은편에 안내 데스크가 있었다. 밝은 미소를 띤 직원들은 능숙한 영어로 뮤지엄을 소개해주었다. 2011년 문을 연 하치 포탈 뮤지엄 Hacchi Portal Museum은 지역 문화 전시를 통해 도시의 매력을 소개하고, 지역 문화 활성화를 위한 창작과 교류의 장이 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상설전시뿐 아니라 하치노헤에 거주하는 아티스트들의 작품을 소개하는 특별전시도 지속적으로 기획하고 있다. 안내 데스크 오른편으로는 4층까지 닿는 높은 천장 아래에 테이블과 알록달록한 의자들이 놓여 있고 그 너머에는 또다시 사자 머리 모양 목각 인형이 여러 개 붙은 빨간 벽면이 서있었다. 입구의 전시용 인형들과는 달리 매시 정각이 되면 인형들이 턱을 부딪혀 커다란 소리로 시간을 알려주는 실용적인 역할도 하고 있었다. 왼편에는 카페와 기념품 매장이 있었고, 데스크 너머에는 극장과 방송 스튜디오, 그리고 전시 부스 몇 개가 놓여 있었다. 카페 안쪽에서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크게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부스는 모두 지역의 특징을 자랑하는 내용이었다. 지역의 야구단, 술, 수공예, 해안선, 매 봄마다 하치노헤를 찾는 갈매기까지. 지역에 대한 깊은 이해와 애착이 묻어나는 전시였다.
본격적인 전시는 2층부터 시작되었다. 본전시장은 기획자가 심혈을 기울인, 전시보다는 작품이라는 말이 어울릴 법한 공간이었다. 벽에 나란히 걸린 지역 사진을 구경하며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니 실제 크기의 파란색 어선과 그 위를 떠다니는 수십 개의 오징어 모양 전등들을 마주했다. 그 뒤를 이어 널따란 공간을 다양한 매체를 이용한 전시품이 오밀조밀하게 채웠다. 산샤 타이 사이 축제 퍼레이드 일러스트가 새겨진 현수막과 퍼레이드 때 쓰이는 화려한 장식 수레, 나무로 된 부스 안에 마련된 축제 현장의 영상 화면, 지역 장터 모형, 그리고 각종 먹거리 미니어처 등등. 개별적인 오브제로 전시품을 하나하나 살펴보다 또 고개를 들어 공간을 넓게 바라보면 각양각색의 오브제들이 어우러진 조화를 볼 수 있었다. 전시품은 물론이고 공간 배치, 구성까지 꼼꼼히 챙긴 섬세함이 돋보였다. 또한 전시장 구석구석에는 의자가 놓여 있었는데, 이 의자들 역시 그 크기와 모양, 색이 제각각이라 이를 구경하는 재미도 적지 않았다. 3층으로 올라가니 한 켠에는 나무 기둥과 처마로 이루어진 통로가 새로운 공간을 만들며 하치노헤가 배출한 위인들을 소개했다. 나무 통로 끝은 체험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다다미방으로 이어졌고 그 맞은편에는 하치노헤의 현대 산업과 지역에서 발견된 조몬 시대의 유적을 소개하는 전시가 마려되었다. 4층은 코도모 하치라는 이름의 어린이 놀이터가 공간의 절반을 차지했다. 아이들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입구 안으로 들어갈 용기는 나지 않았지만 진홍색 담벼락 너머 다양한 놀이 시설과 그 안에서 소꿉놀이를 하는 아이들을 볼 수 있었다. 나머지 공간은 수공예품을 판매하는 상점들과 휴게실, 오픈 키친, 사무실로 사용되었다. 테이블이 여럿 놓인 휴게실에는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 음악을 듣거나 과제를 하고 있었다. 꼭대기층인 5층은 하치노헤 내의 창작활동을 지원하는 아티스트 레지던스로 사용된다.
하치노헤 포탈 뮤지엄은 바닷가에 가기 전 잠시 들리기에는 볼거리가 많은, 그리고 오래 머물고 싶은 뮤지엄이었다. 미술관 못지않은 양질의 전시는 물론이고 다양하게 꾸며진 공간을 여유롭게 즐기고 싶었다. 그 과정 속에서 자연스레 하치노헤를 이해하게 되고 애정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외지에서 온 방문객조차도 이러하니 뮤지엄을 방문한 주민들의 뿌듯함을 가늠하긴 어렵지 않았다. 특히나 4층의 휴게실에서 만난 청소년들을 보며 하치노헤의 긍정적인 미래를 떠올려 볼 수 있었다. 저 아이들이 오늘날의 많은 이들이 그러하듯 훗날 대도시로 떠나더라도 하치 뮤지엄에서 보낸 지금의 시간이 그들의 마음에 남아 고향을 그리워하게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