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의 보로스 컬렉션 Boros Collection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지 30년이 더 지났지만 베를린에는 그 시절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지붕이 반쯤 무너진 교회와 그래피티로 채워진 장벽의 일부, 그리고 그 기억을 잊지 않고 간직하는 여러 기념물들. 그 흔적들은 대개가 차갑고 고요한 분위기로 감싸여 있어 세월도 마모하지 못한 그 시절의 어둠을 여실히 보여주는 듯하다. 베를린 중심에 자리 잡은 보로스 컬렉션 Boros Collection을 방문했을 때도 예사의 그 차가운 고요를 느낄 수 있었다. 펑화로운 일상이 이어지는 거리에 우뚝 솟은 옛날의 벙커는 아무리 세월이 지났어도 그 무게감을 잃지 않았다. 육중한 덩치를 뽐내는 그 콘크리트 건물은 전쟁 때 그러했듯이 외부의 출입을 반기지 않는 분위기였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위화감 덕분에 제대로 찾아왔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여느 미술관들과 달리 이곳의 입구를 찾는 것은 쉽지 않았는데 그도 그럴 것이 '방문객은 벨을 누르시오'라고 적힌 종이 한 장이 붙은 작은 철문이 그 입구였다. 벨을 누르면서도 이곳은 관계자 전용 출입구가 아닐까 의심을 했지만 다행히 문이 곧바로 열렸다. 내부는 세월이 고스란히 담긴 낡은 콘크리트 벽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천장의 높이도, 복도의 폭도 매우 협소했다. 입구와 이어진 복도를 조심스레 통과하니 제법 환한 공간에서 관람객을 맞이하는 직원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곳 역시 그리 커다란 공간은 아니었지만 작은 복도에 비해 상대적으로 훤히 트인 느낌을 받았다. 직원의 안내로 가방을 사물함에 넣고 매표소에서 예약자 이름을 대고 표를 구매했다. 이곳은 자유 관람은 불가능하고 오로지 가이드와 함께하는 관람만 가능했다. 건물 특성상 화재가 났을 때 원활한 대처를 위해 부득이한 선택이었다고 한다. 가이드 관람은 30분마다 독일어 혹은 영어로 이루어졌고 최대 12명의 인원만 수용할 수 있었다. 그래서 반드시 미리 예약을 해야 했는데 내가 갔던 날은 독일어 밖에 자리가 남지 않았었다.
표를 사고 옆에 마련된 대기 공간에 앉아 가이드를 기다렸다. 차가운 공기가 쾌적했지만 왠지 이곳에는 행동거지도 소심해지고 큰 소리도 내면 안될 것 같았다. 가만히 앉아 앞에 놓여있는 컬렉션 책을 보고 있자니 곧이어 사람들이 하나둘 도착했고 투명 필름으로 된 마스크를 쓴 가이드가 나타났다. 검은 원피스에 노란 샌들을 신은 그녀가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이 차가운 공간과 너무나 잘 어울리는 외모와 목소리를 가진 여자였다. 새하얗게 칠해진 벽과 낡은 콘크리트 벽이 뒤섞여 있는 비현실적으로 묵직하고 차가운 공간에 낯선 언어를 차분히 쏟아내는 가이드를 보고 있자니 영화의 한 장면 속으로 빨려 들어온 기분마저 들었다. 그녀를 따라 작은 방으로 이루어진 공간들을 거닐며 작품을 하나씩 감상했다. 각 공간은 면적도 천장의 높이도 제각각이었다. 덕분에 전시 작품들은 각각의 크기와 특성에 알맞은 공간을 찾을 수 있었다. 어느 공간은 벙커로 쓰이던 벽을 그대로 노출시키기도 하고 어느 곳은 일부만 하얗게 칠하기도 하고 또 어느 곳은 핀 조명 하나로 작품만 비추기도 했다. 작품과 공간이 어우러진 조화가 작품을 더욱 흥미롭게 했다.
보로스 컬렉션은 1940년에 히틀러의 명령으로 지어진 벙커 건물을 개조해 지어진 미술관이다. 1942년 완공된 후 세계 2차 대전 중에 주민 4000여 명이 이곳으로 피신하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 후에 이 거대한 건물은 많은 사람들의 손을 거쳐 다양한 용도로 쓰였다. 열대과일 창고로 쓰일 때에는 '바나나 벙커'라는 별명이 붙기도 하고 그 후에는 세상에서 가장 독한 클럽으로 명성을 떨치기도 했다. 그리고 1995년 테크노 클럽이 문을 닫은 후 벙커는 예술가들의 손으로 넘어갔고 2003년 벙커를 구입한 크리스챤 보로스 Christian Boros가 오늘날의 미술관으로 탈바꿈시켰다. 그리고 그 자신은 벙커의 맨 위층에 팬트하우스를 지어 살고 있다. 4년에 걸쳐 1800톤에 이르는 콘크리트를 제거하는 대대적인 개조 공사를 마친 후 보로스 컬렉션은 2008년 첫 전시를 선보였다. 2미터에서 20미터까지 다양한 높이를 가진 방 80개로 이루어진 미술관은 4년마다 전시 구성을 바꾸며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이 방에서 저 방으로 옮겨 다니고 한 작품을 아래에서 올려다봤다 한층 올라가 내려다봤다 돌아다니니 건물의 구조를 파악하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제각각 크기와 높이가 다른 방들이었기 때문에 방 두 개가 수직으로 겹쳐 있다거나 뚫린 창 사이로 두 층 위에 있는 방의 일부가 보이기도 해서 온갖 공간이 좌우상하로 얽혀있는 듯했다. 가이드가 있었기에 마음 놓고 이 미로 같은 공간들을 즐길 수 있었지만 가이드 없이는 길을 잃기가 십상이다 싶었다. 독일어를 못하는 나를 제외한 다른 관람객들은 가이드의 차분한 설명에 집중하며 작품을 감상했고 종종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관람은 매우 정숙한 분위기로 진행됐다. 5층까지 이어진 전시를 다 보고 나니 어느새 한 시간 반이 훌쩍 지나가 있었다. 처음 표를 샀던 로비를 지나 작은 철문을 통해 밖으로 나왔다. 탁 트인 공간에서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시자 긴장이 풀리고 현실감각이 돌아오는 듯했다. 관람 내내 조용했던 한 가족은 나오자마자 입구 옆에서 단체사진을 찍으며 유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공간이 주는 무게에 눌려있었던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