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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아 Mar 07. 2021

인류의 역사를 고이 실은 현대판 노아의 방주

파리의 께 브랑리 자크 시락 박물관

전시장으로 들어가기 위해 어두운 계단을 오르니 프로젝터에서 나오는 붉은 영상이 곡선으로 휘어진 벽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이 보였다. 커다랗게 확대된 적혈구가 빠른 속도로 혈관을 따라 흘러가는 영상이었다. 전체적으로 낮은 채도에 조명이 어둡게 깔려있던 박물관 내부와 대비되는 색이 매우 강렬히 와 닿았다. 휘어진 벽에는 적혈구에 이어 붉게 타오르는 태양이 이글거리는 에너지를 내뿜으며 나타났다. 전시의 초입에서 관람객을 사로잡기에 충분히 인상적인 장치였다. 다만 내가 보러 온 ‘철’에 대한 전시장이 맞나 잠시 의문이 들었다는 것만 빼면 말이다. 그러나 뜨겁게 타오르는 영상 왼편에 놓인 전시 서문을 읽고 나니 영상의 존재를 바로 납득할 수 있었다.


« 100억 년도 더 전에 우주가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을 때 생겨난 철은 그 이후로 주욱 우리 주변에 그리고 우리 안에 존재했다. 철은 지구의 내핵과 지각을 구성하는 요소 중 하나이고, 우리 몸속 혈관을 흐르며 이글거리는 태양과 같이 우리의 피를 빨갛게 하는 것도 철이다. 그리고 이 붉은 피는 아프리카 대장장이들이 망치로 붉게 달구어진 쇠붙이를 두드리던 소리와 같은 심박 소리에 맞추어 우리의 온몸을 돌며 우리를 살아있게 한다. »


관람객을 맞이하는 혈관을 흐르는 붉은 적혈구 영상
쇠를 두드리다 전시장 입구


철과 피와 태양을 아우르는 메타포가 자연스레 대장장이의 망치질로 이어지는 기발한 소개가 전시의 문을 여는 서문이었다. 인류 최초로 철을 제련한 것은 2500년 전 아프리카인들이었다. 그래서 철에 대한 시적 메타포로 시작한 이 전시는 몇천 년 전에 제작된 무기부터 최근에 만들어진 공예품까지 아프리카 철기 문화를 소개하는 전시였다. 강렬한 영상으로 시작한 붉은색은 내내 전시장을 뒤덮으며 거무스레한 철기 전시품들과 조화를 이루었다. 덕분에 전시장을 누비며 혈관을 흐르는 적혈구가 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쇠를 두드리다, 아프리카 철기 문화 (Frapper le fer, L’art des forgerons africains)’ 전이 열린 곳은 파리 7구에 자리 잡은 국립 인류사 박물관이다. 유럽을 제외한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 오세아니아 문명을 소개하기 위해 자크 시락 대통령 시절에 지어진 이곳은 '께 브랑리 자크 시락 박물관 Musée du quai Branly Jacques Chirac'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신석기시대부터 20세기까지 4개 대륙을 아우르는 문화를 연구하다 보니 그 수집품만 37만 점에 이른다. 이 어마어마한 규모를 가진 박물관을 짓기 위해 프랑스 정부는 공모전을 열었고 건축가 장 누벨 Jean Nouvel의 계획이 최종적으로 선정되었다.


장 누벨의 아이디어는 매우 기발했다. 개인적으로 이곳처럼 비정형적인 내부 구조를 지닌 박물관은 본 적이 없다. 우선 상설 전시가 열리는 커다란 공간은 따로 나뉘지 않은 채 하나의 전시 공간으로 개방되어 이어져 있었다. 높다란 천장에 단층으로 이루어진 이 곳에 각 대륙에서 온 전시품들이 느슨한 경계로 나뉘어 각자의 영역에 전시되어 있었다. 아프리카 유물들을 한참 보다 방향을 잘못 꺾으면 바로 아메리카나 아시아 문명을 마주하는 식이었다. 이곳은 천차만별인 소장품이 주는 원시적인 느낌과 커다랗고 기다란 구조가 마치 노아의 방주를 연상케 했다. 그리고 방주 한가운데에는 갈빛 담벼락이 고불고불 이어져 전반적인 인류사를 원시시대 벽화와 같은 단순한 그림으로 소개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해하기에는 너무나 원시적이라 나는 그 전하려는 바를 이해하지 못하고 말았다.


상설 전시장 내부
특별 전시로 통하는 계단

광대한 전시 공간을 가득 채운 수많은 유물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는 것은 몹시 흥미로웠다. 전시품 하나하나 알맞은 자리에서 알맞은 조명 아래 적절하고 친절한 설명문과 함께였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내부가 전체적으로 어둡고 창문도 없었기 때문에 바깥세상과 단절된 채 기나긴 인류의 역사를 거니는 기분이었다. 그것도 대홍수로 뒤집어진 세상 속에서 다양한 생명을 담고 떠다녔던 노아의 방주를 떠오르게 하는 공간에서 말이다. 한참 공간을 걷다 보니 조금씩 구조가 이해됐다. 처음 철기 전시를 보기 위해 올라갔던 것과 같은 계단은 전시실 안에 띄엄띄엄 총 3개가 있었다. 이 계단들로 이어진 위층 공간은 전시실 안에 설치된 다락과 같은 공간이었고 세 곳 모두 특별 전시를 위해 쓰이고 있었다. 특별전은 아래의 상설전시장과는 달리 붉은색으로 채워지거나 파스텔톤으로 화사하게 꾸며져 있었다. 한 공간 안에 담긴 완전히 다른 공간이었다.


신비로운 체험을 한 마냥 다양한 문화를 유영하다 밖으로 나오니 회색 구름이 가득 채운 하늘을 배경으로 우뚝 서있는 에펠탑이 보였다. 몇천 년 전 아프리카인들이 만든 철기를 보다 저렇게 커다란 철제 구조물을 보니 인류의 발전이 새삼스레 느껴졌다. 박물관 마당 한편에는 방문객들이 나무 아래 옹기종기 앉아 에펠탑을 구경하고 있었다. 이 거대한 철제 구조물을 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파리를 방문하는가. 아프리카인들이 두드리던 철기가 한 도시의 상징이 되어 세계에 명성을 떨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문화란 참으로 복잡다단한 한편 얄궂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문객들을 지나 박물관 건물을 따라 이어진 정원을 걸었다. 아직 앙상하게 메마른 나무들 사이로 급히 봄을 맞이하러 나온 꽃들이 곱게 피어있었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는 소리였다.


박물관 정원에서 보이는 에펠탑
박물관의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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