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신미술관과 21_21 디자인 사이트
포근한 기온에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계절에 도쿄를 찾았다. 세계 곳곳에 퍼진 일본의 예술 문화를 현지에서 보고 싶었다. 역설적이게도 지구 절반을 돌아 프랑스에 오니 옆 나라 일본의 예술을 접할 일이 한국에서보다 잦았다. 그들의 문화 마케팅에 혀를 내두른 적도 여러 번이고 그들의 영향력에 분을 삭인 적도 여러 번이다. 그래서 그들의 미술관이 몹시 궁금했던 차였다. 제일 먼저 롯폰기에 자리 잡은 국립신미술관National Art Center Tokyo을 찾았다. 국립신미술관은 도쿄국립근대미술관, 교토국립근대미술관, 국립서양미술관, 오사카국립미술관에 이은 일본의 5번째 국립미술관이다. 또한 일본에서 제일 큰 1만 4천 제곱미터에 달하는 전시공간은 매번 특별 전시로 채워진다. 지하철역과 연결된 입구를 통해 미술관의 로비로 바로 들어갈 수 있었다. 월요일 오전임에도 사람들이 붐볐다. 그중 일부는 유리로 된 외벽을 따라 놓인 의자에 앉아 바깥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고, 또 다른 일부는 로비 중앙에 마련된 카페에서 식사와 차를 즐기고 있었다. 쉽게 비어 있는 의자를 발견하기 어려울 만큼 복작거렸다. 그러나 로비의 인파에 비해 정작 매표소와 전시장 입구에는 줄을 선 사람이 현저히 적었다. 기이하다면 기이할 수 있는 모습에 전시장으로 가던 발길을 돌려 나도 로비 한편에 자리를 잡았다.
높은 천장과 유리창이 만든 시원한 공간 안에 화장실, 카페, 기념품 매장으로 이용되는 모던한 회색빛 구조물이 들어섰다. 회색 구조물과 유리창, 그 너머로 보이는 하늘과 초록 나무들이 미술관의 전경을 이루었다. 내부를 살피던 시선이 자연스레 창밖으로 넘어갔다. 창밖의 나무들이 바람에 살랑대는 모습이 보였다. 실내에 앉아있었지만 공원에서 휴식을 하는 편안한 기분이었다. 다른 이들도 나와 같은 이유로 이곳에 머무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밖으로 나가보니 실제로 미술관 마당은 다양한 식물들이 단정히 정리된 푸르른 공원이었다. 미술관 내부보다는 한적했지만 오가는 사람들과 머무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밖에서 본 미술관은 그리드와 유리창으로 이루어진 벽이 곡을 그리며 전면을 감쌌고 그 중앙에는 정문 역할을 하는 넓은 원형의 공간이 더해졌다. 정문 주변으로는 화단과 벤치가 놓여 있었고 커다란 나무들이 그 위로 그늘을 만들었다. 벤치에 앉아 주먹밥을 먹는 할머니와 유모차를 끌고 나온 젊은 여자도 보였다. 내가 미술관을 온 것인지 공원을 온 것인지 헷갈렸지만 전혀 문제 될 것이 없는 혼동이었다. 푸르른 나무들과 선선한 바람을 만나든, 거장의 유채화를 만나든 마음이 풍요로워지기는 매한가지였다. 결국 인상주의 작가의 전시는 까맣게 잊은 채 자연과 사람들을 구경하다 미술관을 나왔다.
국립신미술관을 나와 다음 목적지인 21_21 디자인 사이트21_21 Design Sight를 향해 걸었다. 빽빽하게 들어찬 높고 낮은 건물들과 그 사이를 바삐 오가는 인파들이 도시의 일상을 생생히 보여주었다. 국립신미술관에서 몇 블록 걷자 곧 미드타운 지역의 푸른 공원을 만날 수 있었다. 반짝이는 무채색 건물들 사이에서 햇빛을 받은 나무들은 유난히 푸르러 보였다. 마침 점심시간이라 흰 셔츠를 입은 직장인들이 공원 안에서 삼삼오오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핸드폰 지도의 화살표도 공원 안을 가리키고 있었기에 나도 그들 사이로 들어가 잠시 공원을 산책했다. 양옆으로 늘어선 높은 건물들 사이에서 작은 공원은 테마파크 같기도 하고 사막의 오아시스 같기도 했다. 잘 닦인 산책로와 역시 잘 정리된 화단과 나무들은 몹시 깨끗한 인상을 주었다. 언뜻 보기에 공원은 넓어 보이지 않았지만 안으로 들어갈수록 점점 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산책로를 따라 반려견과 걷거나 조깅을 하는 사람들도 보였다. 한 켠에서는 분홍색 풍선으로 장식한 프랑스 샴페인 브랜드 샹동의 팝업 카페가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맞은편에 낮게 자리 잡은 회색 건물이 21_21 디자인 사이트였다.
21_21 디자인 사이트는 패션 디자이너 이세이 미야케가 디자인 뮤지엄의 필요성을 적극적으로 호소한 결과 2007년 도쿄 미드타운 공원 안에 문을 열었다. 건축가 안도 타다오가 이세이 미야케의 작업에서 영감을 받아 설계를 맡았다. 21_21 디자인 사이트라는 이름은 미래 지향적 비전을 제시하기 위해 흔히 사용하는 ‘20/20 vision’에서 착안해 이를 넘어선 비전을 보여주는 장소가 되고자 하는 미술관의 의지를 담았다. 또한 디자인이 우리 일상에 깊이 녹아들어야 한다는 컨셉에 맞추어 일본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주소 표지판 디자인에 21_21을 새긴 하늘색 철판이 미술관의 상징이 되었다.
단층의 미술관은 밖에서 보기에 매우 협소해 보였으나 이곳의 진수는 지하 공간에 넓게 펼쳐져 있었다. 입구에 들어서면 매표소와 기념품 매장이 보이고 그 너머로 좁은 계단을 내려가면 전시장에 이른다. 육각형의 한 꼭지를 바닥으로 끌어내려 세모난 단면을 만든 것 같은 건물의 외관이 그러했듯이 내부 공간 곳곳에서 기하학 도형의 조합을 발견할 수 있었다. 덕분에 내부 구조는 우리가 흔히 아는 사각 그리드에서 벗어나 공간을 체험하는 재미를 극대화했다. 건축물 자체만으로도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듯했다. 밖에서, 또 안에서 찬찬히 그 작품을 살펴보다 보니 낮게 깔린 평면적인 건물은 공원 안 설치 작품처럼 보이기도 했다. 높은 빌딩 사이의 단비 같은 공원, 그 푸르름 사이의 종이접기 같은 건축물, 그 조형성 안에서 만나는 디자인의 세계. 일본의 내로라하는 아티스트들이 머리를 맞대어 만든, 도심 속에 자연스레 녹아든 자연과 미술관의 조화였다.
이날 방문한 두 미술관이 인상 깊었던 것은 사실 미술관의 본래 목적이라 할 수 있는 전시 덕분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앞서 거듭 언급한 자연이 두 미술관을 돋보이게 했다. 모든 예술은 자연의 모방이라는 로마 시대 철학자 세네카의 말처럼 예술과 자연의 관계는 꽤 밀접하다. 예술이 주는 감동과 자연이 주는 감탄이 다르지 않기에 우리가 이 둘을 찾는 이유 역시 결국은 같을 것이다. 두 미술관이 자연과 어우러져 만들어낸 시너지 효과를 보며 예술 작품에 대해 논하기보다 미술관의 풍경을 보여주는 것이 대중에게 더 와 닿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그리고 두 미술관을 찾은 방문객들이 자연과 예술을 경계 없이 즐기듯 자연스레 사라지는 일상과 예술의 경계 또한 생각해 보았다. 자연만큼 자연스러운 것이 어디 있으랴. 세계에 퍼진 일본 예술 문화의 원천이 무엇인지에 대해 답하기는 너무나 단편적인 방문이었지만 자연과 함께하는 미술관에 자연스레 발길을 옮기는 도쿄의 시민들을 보니 두 미술관의 미래가 궁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