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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민아 Sep 25. 2021

결혼 5주년 기념 중간 정산

전쟁 역사와 간헐적 평화


2016년 9월 24일, 서울의 한 예식장. 결혼식 내내 당차다 못해 기가 찰 정도로 수줍음이 전혀 없던 한 새신부가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결혼식에서 마이크를 잡고 스스로 축가를 부른 뒤 버진로드를 내려왔다. 하객들은 새신부를 보고 결혼 한 번 해본 것처럼 능숙하다며 농담을 건네기도 했다. 그 씩씩한 신부가 바로 나다. 예비 남편이 지금껏 프러포즈를 안 했으니, 나라도 늦기 전에 해야 할 것 같아서 서프라이즈로 준비한 축가 이벤트는 양가 친인척들에게 한 동안 회자가 되었다. 시아버님은 우리 핏줄 쪽에서 볼 수 없는 사람이 새 식구가 되었다 하시며 자랑스러워하셨다.



결혼 직전 바로 전 남친, 그러니까 지금의 현 남편은 참으로 선한 사람이다.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에서 배우 유연석이 역할이 맡은 안정원 같은 사람이다. 타인에게 참 따뜻하고 마음도 여리며 눈물도 많다. 나와 남편이 마음을 연 계기는 서로에게 같은 경험이 하나 있었고, 그 경험을 통해 탄탄한 공감대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우린 각자의 대학시절에 인도 캘커타 마더 테레사 하우스를 다녀왔었고, 캘커타에 머물렀던 기억을 소중히 여겼었다. 따라서 서로가 인생의 두 번째 인도를 갈망하고 있었고, 갈 수 있다면 곁에 있는 사람과 함께 가고 싶었다. 결국 우리의 신혼 여행지는 인도 캘커타 마더 테레사 하우스였다.



남편은 결혼 당시 중국에 위치한 외국계 회사에 3년 가까이 근무하고 있었다. 나는 결혼 전 남편과 눈물 질질 짰던 장거리 연애를 했고, 결혼 후 서로의 시공간을 합치기 위해 한국 생활을 정리하고 중국으로 건너갔다. 중국에서의 신혼생활은 꿈만 같았다. 매일 밤 자기 전 다음 날이 늘 설레고 기대되었다. 중국어를 전혀 하지 못했던 나는 남편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고, 남편은 자신에게 기대는 아내가 어린아이 마냥 귀여웠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 부부도 보통의 부부들처럼 신혼의 단꿈이 깨지고 난 뒤 소위 말하는 현타(현실 자각 타임)가 왔다. 결혼 후 출국 전 공항에서 샀던 책 알랭 드 보통의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이 미래를 암시하는 복선이 되었던가. 낭만적 신혼과 귀국 후 일상은 예기치 못한 일들의 연속이었다.

우선 우리 부부는 아이를 출산하기 위해 귀국을 했었고, 한국에서의 생활은 둘이 아닌 셋이었다. 나는 뱃속에 아들이 호랑이콩만한 크기로 영롱하게 자리 잡고 있는 그 순간부터 엄마였다. 모성애라는 초인적인 힘은 한 인간의 성격과 세계관을 바꿔놓았고, 남편은 의도치 않게 결혼 전 자신이 알던 조민아가 아닌 다른 조민아와 살게 되었다. 출산 이후 나는 지독히 예민해졌고, 나를 이루고 있는 모든 감각의 센서는 오로지 아이를 기준으로 발동되었다. 감정의 희로애락이 아이에게 집중되어 있었기에 산후우울증이 오기 딱 좋은 케이스였다. 더불어 남편 역시 귀국 후 새롭게 자리 잡은 일을 적응하느라 인고의 시간을 보냈고, 그 사이 몸과 마음이 많이 상했었다.



출산 후 약 2년간 남편과 나는 혹독한 해병대 캠프 같은 초보 부모 훈련을 받았다. 남편 역시 느닷없이 아빠가 되어서 외부 환경에 의한 인위적인 책임감과 갑자기 부여받게 된 가장이라는 역할에 멘탈이 와장창 깨졌다. (우리 남편은 마음이 여린 만큼 정신력도 가냘프다) 남들에게 좀처럼 힘든 내색을 잘 안 하는 나는 남편의 나약한 모습에 많이 실망했었다. 반대로 남편은 빡세고 독한 아내가 무서웠고 두려웠을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남녀가 부부가 되고, 부부는 부모가 되는 것이 남들에게 지극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지만 우리 부부에게는 지독히 잔인했다. 결혼 전 단 한 번도 싸운 적이 없었던 우리 부부는 결혼 이후 다툼이라는 것을 처음 해봤다. 같은 공간에서 가정의 구성원으로 살고 있는 사람과 하루가 멀게 싸우고 화해하는 과정을 반복한다는 것은 참으로 사람을 지치게 했다. 또한 사람마다 품성과 가치관이 다르듯 각자 소지하고 있는 무기가 달랐기에 그 싸움은 더 잔혹했다. 나는 바주카포를 장착하고 있었고 남편은 장난감 비비탄총을 갖고 있는 사람이기에 전쟁의 상흔은 동일할 수 없었다.



아들이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면서 우리 부부는 잠시 휴전을 선언했다. 정확히는 냉전 상태였다. 아이가 깨어있는 낮에는 양국의 평화 사절단이 파견되어 올림픽과 같은 각종 대외행사를 잘 진행했다. 하지만 아이가 잠들면 미국 CIA 요원과 소련 KGB 요원이 파견되어 게릴라 총전을 했다. 다음 날 아침은 또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흘러갔다. 대게 화목하고 평온했지만, 간혹 트리거가 당겨질 때가 있었다.



한 달 전, 우리 부부에게 냉전을 종식할만한 어마어마한 건이 있었다. 내가 먼저 내 마음속 베를린 장벽같이 두텁고 어둔 감정을 털어놓기로 한 것이다. 남편 역시 DMZ의 지뢰를 터트리듯 자신의 마음을 이야기했다. 대화는 생각보다 신사적이었고, 결과 또한 지속 가능한 미래를 지향하는 쪽이었다. 그렇다고 우리 부부 관계에 완벽한 평화가 찾아온 건 아닐 것이다. 단언컨대 분명 이건 냉전의 종식일 뿐, 지금은 잠정적 장기 휴전 상태다.



어제는 우리 부부의 5주년 결혼기념일이었다. 약 5년간의 역사를 돌이켜보니 우리는 징그럽게 사랑했고, 지독히도 싸웠던 것 같다. 결혼이라는 제도 하에 뜨거웠던 청춘 남녀는 어설프게 어른이 되었고, 서툴게 부모가 되었다. 그 어설프고 서툴었던 일련의 시간들에 자연스럽게 따라온 시행착오들이 서로에겐 참으로 혹독했었나 보다. 어쩌면 우리는 삼십 대 초반 청춘이 겪어야 할 현실적인 고민과 번뇌를 함께 나눈 수행 동지이기도 하다. 세계문학전집에 나올 법한 이상향만 동경했던 20대 남녀가 부동산, 육아, 커리어 등 다양한 현실적 문제에 당면한 30대 부부가 되었다. 이것만 봐도 우린 그렇게 싸울만했다. 남편은 농담으로(진담 같지만) 자기는 매일 일진이랑 사는 것 같다고 한다. 양아치 같은 아내 밑에서 수고가 많은 우리 남편은 빵셔틀 하듯이 어제도 꽃배달을 했다. 그래도 기념일에 꽃다발은 잊지 않는다. 어찌 되었든 나 같은 아내 만나서 고생 많은 우리 남편, 싫지는 않지만 죽도록 미운 우리 남편이 앞으로 이어질 5년도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내 곁에 있어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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